▲파도 소리 때문인지 이날 밤 김남희는 오래도록 시를 읊었다.박상규
사람은 상황을 만들고, 분위기는 사람을 흔든다. 김남희가 "너 안도현의 <섬> 아냐"며 시를 읊었다. 시의 한 부분은 이렇다.
"섬에 한번 가 봐라, 그 곳에/ 파도 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봐라"
소파에 가만히 누워 그녀가 읽어주는 시를 듣던 나는 작은 박수를 보냈다. 나의 박수에 '필'이 꽂혔던 것일까, 아니면 파도 소리가 그녀 마음 속 현 하나를 툭 건드렸던 것일까. 뒤이어 김남희는 평소 외우고 있던 김용택의 시 <사랑> 53행 전체를 끊김없이 읊었다. 지난 날 떠나보낸 인연이 떠올랐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파도 소리가 이어지듯 그녀의 시 낭송은 몇 편 더 이어졌다. 소파에 누워있던 나는 답가처럼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읽었고, 김남희와 함께 최영미의 <선운사에서>를 읊었다.
우도에서 맞이한 '어색남녀' 네번째 밤이 파도에 젖은 시 낭송으로 우아해졌다. 그러나 우아했던 분위기를 우습게 만든 것 역시 시 낭송이었다.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은 김남희는 향긋한 국화차를 마시며 마지막으로 이상국의 <국수가 먹고 싶다>를 읊었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싶다..."
창가에 기대 시 낭송을 마친 김남희는 젖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상규야, 국수 대신 라면이나 먹고 자자. 좀 끓여봐라."
나는 "어머니 같은 여자"는 아니지만 잽싸게 라면을 끓였다. 김남희와 나는 마주 앉아 언제 시를 낭송했냐는 듯 김치없는 라면을 후루룩 후루룩 맛나게 먹었다. 살다보면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리면 좋겠다 싶은 밤이 있다. 그런 밤이 우도에서 깊어가고 있다.
#2. 오후 4시 - 우리를 좌절하게 만든 두 라이더
나는 솔직히 '라이더'라는 표현보다 그냥 '자전거 타는 사람'이 더 편하다. 그러나 김남희가 시종일관 '라이더'라 부르니 그냥 그렇게 표현하자.
성산 일출봉이 보이는 해안도로에서 드디어 라이더를 만났다. 여성 두 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을 꺼내기 전에는 여성인지 몰랐다. 제주도의 강한 바람 탓인지 그들은 얼굴을 천으로 칭칭 감았고, 복장은 승복의 연장인 듯했다. 어쨌든 라이더다.
여행 첫날부터 다른 라이더를 찾고 있던 김남희에게 이들의 등장은 큰 기쁨이었다. 김남희가 자전거를 탄 채 은근슬쩍 그들에게 다가가 친한 척을 하려 했으나 그들을 따라가는 것도 버거워했다. 김남희가 헉헉대며 좇아가 알아낸 정보는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두 여성은 우리보다 반나절 쯤 늦은 월요일 오후에 출발했다. 그리고 우리가 출발한 모슬포보다 수십㎞ 더 멀리 떨어진 제주시에서 달려왔다. 복장은 다소 생소했지만, 그들은 여러 가지로 우리보다 튼튼하고 성실한 라이더다.
우리는 사흘 동안 왜 여기밖에 못 왔을까.
#오후 3시 - 나를 무시하고 김남희만 부르다니
김영갑 갤러리에 들어갈 때부터 이미 배는 심하게 고팠다. 나는 "제발 밥 좀 먹고 가자!"고 외쳤다. 그러나 김남희는 "배가 고파야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거야"라며 기어코 점심을 거른 채 김영갑 갤러리로 들어갔다.
김영갑의 사진을 만나고 다시 해안도로로 접어드는 순간. 이 때부터 나는 눈을 좌우로 바쁘게 돌렸다. 식당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오른쪽은 바다뿐이고 왼쪽은 공장 아니면 숲이다. 식당은 보이지 않고 가끔씩 포장마차만 나타났다.
어느 포장마차에서 아저씨와 아줌마가 삼겹살을 지글지글 굽고 있었다. 그 냄새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나는 그들이 "이리 와서 한 점 먹고 가요"라고 외치기를 기대하며 천천히 자전거를 몰았다. 그러나 그들은 '저 사람 왜 빨리 안 달리고 그래'라는 눈빛을 보냈고, 내 눈은 그 짧은 순간에 그들의 불판에는 삼겹살뿐만 아니라 붉은 배추김치도 함께 익어가는 걸 확인했다.
구차하게 살지 말자고 다짐하며 앞으로 달리는데, 뒤에서 김남희가 소리친다.
"야, 박상규 이리 와! 점심 먹고 가래!"
나를 통과시킨 그들. 김남희는 세웠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여자보다 남자들이 살기 쉬운 세상이지만, 아주 가끔은 이렇게 여자라서 좋을 때가 있다. 김남희 덕에 나는 그들의 식사에 끼었다. 그리고 가능한 아주 많은 삼겹살을 먹었다. 육식을 하지 않는 김남희와 함께 다니는 동안 고기먹을 일은 이럴 때밖에 없다.
내가 삼겹살을 우악스럽게 먹는 동안 김남희는 구운 김치만 먹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