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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 7] 장수는 전쟁터에, 가족은 개경으로

등록 2006.12.06 14:35수정 2006.12.0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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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으로 전국적인 명망을 얻은 장군

이성계는 천부적인 군인이었다. 무가(武家)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특출한 무예 솜씨를 보이던 그가 군인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361년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부터다.


여세를 몰아 홍건적에 함락된 개경을 탈환하는데 혁혁한 무공을 세웠으며, 흥원지방에 침투한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와 맞붙어 격퇴했다. 이때부터 장군 이성계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BRI@이듬해 원나라 괴뢰정권을 세우려고 원(元)병 1만을 이끌고 평안도에 들어온 덕흥군을 최영 장군과 함께 수주 달천에서 섬멸시켰다. 여진족이 동북면을 유린하자 이들을 격퇴하고 동북면의 평온을 되찾았다.

이 공으로 그는 한 때 화령부윤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떠나야 하는 군인이었다. 명이 떨어지면 움직여야 하는 무인이었다. 붙박이로 한군데 눌러앉을 수 없는 장수였다. 이 무렵 함흥부 후주에서 얻은 아들이 이방원이다.

남해안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최영 장군에게 대패하여 물러갔으나 전열을 가다듬어 대규모 공격을 해왔다. 500척의 선단을 진포에 메어두고 하삼도를 점령했다. 해안에 상륙하여 상주, 경산, 함양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방원이 열두 살 되던 1380년. 양광, 전라, 경상, 3도순찰사를 명받은 이성계는 내륙을 짓밟던 왜구를 지리산까지 추격하여 아기바투(阿其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했다. 훗날 이것을 황산대첩이라 한다. 이때부터 이성계는 중앙정치 무대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전선을 떠도는 장수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이성계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자식들의 교육문제다. 자신이야 어차피 군인의 길로 들어섰지만 자식들만은 군인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숙제는 전선을 떠도는 자신의 처지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다. 이때 그에게 개경에서 희소식이 날아 들어왔다.


국가의 동량을 배출하던 성균관이 국자감으로 이름이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개문휴교 상태였는데 이름을 되찾으며 다시 문을 연다는 소식이었다. 교수진도 빵빵했다. 당대의 석학 이색을 비롯하여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등의 교수진과 정도전, 권근, 하륜, 길재 등이 드나든다는 것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개경으로 살림집을 옮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개경 번화가에서 선죽교 건너 숭인문으로 나가는 길목 어배동에 집을 마련했다. 부흥산 자락에 자리 잡은 성균관과 가까운 곳이다. 개경을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를 두고 최영 장군 집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위치였다. 자식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로 선택한 것이 개경 진입이다.

개경에 터전을 마련했지만 문제는 있었다. 이성계는 군인이었기에 가장으로 눌러앉지 못하고 전선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었다. 아들 다섯의 뒤치다꺼리는 오로지 부인 한씨의 몫이었다. 이때부터 부인 한씨의 길고 긴 인고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집안의 기둥을 전쟁터에 빼앗기고, 아들 다섯이 있는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가장이 된 것이다.

개경생활은 외롭고 서글펐다. 일가 친척 하나 없는 낯선 타향은 가장 없는 한씨의 두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힘들어하는 한씨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이웃 사람들이 함길도 촌뜨기라고 업신여기는 것이었다. 개경 사람들 특유의 배타성이 한씨를 힘들게 했다. 다시 동북면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동북면은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지아비 이성계의 주변에는 항상 젊고 예쁜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경으로 이사 오기 전 화주와 길주에 살 때도 마음고생이 심했다. 드러내놓고 투기할 수도 없고 바라보자니 가슴이 아팠다. 그 중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개경에서 왔다는 묘령의 아가씨였다.

함길도 야생마를 길들이는 조련사

방원이를 처음에는 성균관으로 곧장 보내지 못했다. 머리에 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균관은 초시에 합격한 유생들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받은 자들의 교육기관이었다. 학문이 깊은 스승을 구해 사사(師事)를 하였다.

이때 방원이 만난 스승이 원천석(元天錫)이다. 개경 바닥에서 꼬장꼬장하기로 소문난 유학자였다. 훗날 패망하는 고려조에 충의를 지켜 두문동 72현에 들어간 사람이다.

방원은 원천석에게 호된 학습을 받았다. 아버지를 따라 변방을 떠돌던 방원에게 학문에 앞서 예의범절부터 가르쳤다. 훗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스승 원천석을 잊지 못해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끝내 나오지 않고 원주 치악산에 묻혀 생을 마감했다. 한마디로 야생마 같던 이방원의 인간성에 초석을 깔아준 사람이 원천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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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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