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가든 새 신랑, 송도팔경 유람 떠나다

[태종 이방원 9] 꿈같은 신혼생활

등록 2006.12.08 16:23수정 2006.12.09 12:45
0
원고료로 응원
새 신랑 송도팔경 유람 떠나다

이방원은 혼례를 올리고 장인 민제가 마련해준 추동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개경의 중심번화가 십자로에서 용수산 가는 길에 연복사가 마주 보이는 곳이다. 연복사는 개경인들이 즐겨 찾는 명찰(名刹)이다. 훗날 왕후에 오른 민씨(원경왕후)가 5층 석탑을 시주한 곳이다.


처가도 가까웠다. 큰 목소리로 고함치면 들릴 것 같고 한 달음에 달려갈 거리였다. 전리정랑으로 관직에 나아가기까지 꿈같은 신혼생활이었다. 신혼이라 해서 색시 치마폭을 붙잡고 세월만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달콤한 신혼생활 틈틈이 개경의 명승 절경을 유람했다.

@BRI@진산 송악이 우뚝 솟아 있고, 용수산이 어머님 품처럼 아늑한 도읍지가 개경이다. 송악산이 있는 도읍지라 하여 송도라는 별칭을 얻었다.

송도에는 명승 절경이 많아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 있었다. 백악에 걸쳐 있는 구름(白岳晴雲)과 북산에 서리는 연기와 비(北山烟雨)는 한 폭의 산수화였다. 장단의 절벽(長湍石壁)과 박연폭포(朴淵瀑布)는 웅장함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 바로 그것이었다.

자하동에서 스님을 찾아(紫洞尋僧) 서강에서 불러오는 바람과 눈(西江風雪)을 맞으며 청교에서 배웅하는(靑郊送客) 모습은 석별의 정 바로 그것이었다.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하는 그들을 비추는 황교의 저녁노을(黃橋晩照)은 이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별리의 또 다른 서정이었다. 승과 속 그리고 자연이 연출한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예성강 저녁노을은 환상이었다


송도에는 박연폭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쌍폭동의 두 줄기 폭포수도 일품이다. 꽃피고 새우는 춘삼월 채하동의 꽃놀이는 새 생명의 기쁨이었으며, 보정문 밖 시루못(甑池)에서 펼쳐지는 단오제는 약동을 확인하는 축제였다. 또 서교정에서 바라보는 예성강 저녁노을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환상이었다.

벽란도의 뱃놀이는 물살이 빨라 무서웠지만 짜릿한 맛이 있었고, 만수산 계곡에 발 담그는 탁족은 신선놀음이었다. 관덕정에서 한량들과 활시위를 당겼을 때는 자신이 무가(武家)의 자손임을 실감했다. 훈련받은 솜씨가 아님에도 과녁을 빗나가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의 생애에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신혼생활에 푹 빠져 학문의 끈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 더 깊이 빠져들어갔다. 조정에 나아가 청운의 꿈을 펼치려면 더욱 분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과거에 급제한 것이 영광이 아니라 7등으로 턱걸이를 한 것이 욕스럽게 다가왔다. 이때 맞이한 스승이 우현보다.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성리학은 신학문이었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학문이었다. 꿈 많은 젊은이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혼란스러운 시대상황과 맞물려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방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리학에 푹 빠졌다.

도덕성에 갈증을 느낀 젊은이들, 신학문에 빠져들다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들여와 알려지게 된 성리학은 주희의 이름을 따 주자학이라고도 불린다. 불교 도교의 영향을 받아 다소 흐트러졌던 학문을 북송대의 주돈이가 태극도설을 주창하고 남송대 주희가 새로운 해석을 덧붙여 완성한 신유학이다.

공허한 자구해석에 빠졌던 공맹사상을 이기심성학(理氣心性學)으로 승화시킨 것이 성리학이다. 이(理)와 기(氣)를 두 기둥으로 삼고 생성론을 바탕으로 한 존재론을 근간으로 심성론 수양론에 걸쳐 정연한 이론을 완성한 성리학은 이 땅의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이(理)와 기(氣)는 원칙적으로 불상리(不相離) 불상잡(不相雜)의 관계로 이(理)가 존재의 원리로서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기(氣)에 이(理)가 우월하다고 보는 성리학은 무반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했다.

즉 이(理)는 선천적인 것으로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근본원리이며 도덕적 법칙이기 때문에 그 어떤 가치에 우선해야 한다는 성리학은 파생적으로 문무의 존재를 규정하는 전범이 되었다. 이의민을 몰아내고 무반 철권통치를 펼쳤던 최충헌 이후 위축되었던 문인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 주었다.

성리학은 당대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새로운 세계가 보인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가 우선돼야 한다는 성리학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도덕의 불문율로 다가왔다.

이러한 학문이 들불처럼 번져가고 마약처럼 중독되어가는 것은 부패한 시대 상황이 좋은 토양 역할을 했다. 왕과 신하가 여자 하나를 놓고 치정극을 펼치다 왕이 죽어간 나라. 이러한 난맥상에 승려와 군인까지 합세하여 개경 바닥은 온통 썩은 냄새로 진동했다. 이러한 와중에 도덕을 앞세운 성리학은 신선했다. 부패의 소금은 도덕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진중에 있는 장수 이성계마저 부하 장졸 중에 성리학을 깨우친 자를 찾아내어 강독을 들었을까. 전선에 나가 있는 장수가 병서나 진법 책을 보는 것도 아니고, 케케묵은 공맹을 바탕으로 한 학문인 성리학을 보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 뿐만이 아니다. 잠시 개경에 나올 때면 아들 방원을 불러 성리학의 진도를 점검하기도 했다.

성리학은 학문의 블랙홀이었다

신학문을 접한 당대의 석학들도 빨려 들어갔다. 성리학은 학문의 '블랙홀'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길재(吉再), 정도전(鄭道傳)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학문의 회오리도 힘 앞에는 무력했다. 무단이 기승을 부릴 때는 희생자를 많이 냈다.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길재는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면서 사화(士禍)라는 파도를 넘으며 많은 희생자를 냈다. 정치는 생물이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하다. 도덕이라는 단일 무기로 무장한 사림이 생존하기에는 비정하고 삭막한 환경이었다.

도덕성에서 우위를 점한 자들이 그렇지 않은 않는 자들을 외면하거나 무한 공격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이 성리학이다. 내가 깨끗하면 너도 깨끗해야 하고, 깨끗하지 못하면 지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이유를 살피는 배려가 없는 것이 성리학이다. 이러한 맹점을 극복하고 계승 발전해 이퇴계(李退溪)와 이율곡(李栗谷) 대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변방의 군영, 함주 막사를 찾아온 반골정신의 선비

이방원이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던 1383년. 이성계는 동북면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여진족을 이지란과 함께 궤멸시키고 함주에 머물고 있었다. 이지란은 여진족 추장출신(쿠룬투란티므르)으로 고려에 귀화한 인물이다. 고려에 귀화했다기보다도 이성계의 용맹에 감복하여 동북면에 눌러앉았으며 이성계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중앙정치무대와 멀리 떨어진 동북면에서 느긋하게 군 생활하고 있던 이성계의 함주 막사로 정도전이 찾아왔다. 뜻밖이었다. 붓을 쥔 선비가 칼을 쥔 장수를 찾아온 것이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이 찾아간 것은 정도전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