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미 대통령과 외교안보팀.(자료사진)백악관 홈페이지
더욱 중요한 문제는 부시 행정부의 요구가 북한의 '기대'는 물론이고 9·19 공동성명에 언급된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과도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과의 접촉에서 요구한 초기 이행조치 목록에는 ▲영변 5MW원자로 등 핵시설 가동중단 ▲가동중단 여부를 확인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관 수용 ▲핵무기와 핵물질을 포함한 모든 핵 관련 프로그램의 성실한 신고 ▲핵실험장 폐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반해 미국은 대북 에너지 지원, 안전보장, 평화협정 체결, 북미관계 정상화 등 위의 요구사항들에 대한 상응조치들은 북한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 '다음'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회담장에서 이러한 입장을 고수할 경우, 북한은 미국이 선(先) 핵폐기 노선을 고집하고 있다며, 강력 반발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전망은 북한이 예전에 제시한 바 있는 '첫단계 동시행동'의 내용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북한이 2003년 12월 9일 발표한 제안을 보면, 북한은 "핵무기를 더 만들지 않으며 시험도 하지 않고 이전도 하지 않으며 평화적 핵동력 공업까지 멈춰 세우는 동결조치"를 취하고, 동시에 미국은 "테러 지원국 명단 해제, 정치·경제·군사적 제재와 봉쇄철회, 미국과 주변국의 중유 및 전력 제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취해야 할 초기 행동조치 대상을 최대한 넓히면서 자신의 상응조치는 늦추려는 반면, 북한은 자신의 핵동결 대상은 최소화면서 미국으로 최대한 많이 받아내려는 협상 전술을 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미국이 북한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동'에 해당하는 반면, 미국의 상응조치는 '공약'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에 따라 6자회담이 열리면, 북한의 첫 단계 행동에 상응하는 미국 측 행동이 핵심적인 의제가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미국의 공약을 믿고 핵폐기에 돌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볼 때, 미국은 핵 '동결'에 대한 보상을 명시했던 제네바 합의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북한 역시 생존을 위한 '기회의 창'이 될 것으로 믿었던 제네바 합의가 '배신의 늪'에 되면서, 미국의 적대정책 철회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입증되기 전에 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6자회담이 제네바 합의 협상보다 훨씬 힘들고 복잡한 과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공은 북한으로 넘어갔다?
지난 9일 노무현 대통령은 뉴질랜드 방문중에 부시의 대북정책이 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 공은 북한으로 넘어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이제 북한이 양보할 차례라는 해석이 가능한 발언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부시의 대북정책이 크게 바뀌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6자회담의 정직한 중재자와 창의적인 조율자 역할을 해야 할 노무현 정부가 '미국은 바뀌고 있으니 북한이 양보할 차례'라고 오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북한과 미국은 자기 것은 적게 내놓고 상대방 것은 많이 취하려고 할 것이다. 또한 상대방이 행동으로 보여주기 전에는 자신도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북미 양측이 이런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렵사리 열리게 될 6자회담은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한국이 중국, 러시아 등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해온 국가들과 함께 치밀하고 공정하며 창의적인 해법을 만들어 이를 관철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번 6자회담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온다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상당한 탄력을 받을 공산이 크다. 반면 또 다시 말싸움으로 끝난다면, 북한의 2차 핵실험과 미국의 강력한 대북 제재 등 추가적인 상황 악화로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불확실성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운명적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어질 기사: 북한, 핵군축 카드 꺼내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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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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