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91회

등록 2006.12.12 07:30수정 2006.12.12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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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평범하게 하고 있지만 함곡과 풍철한을 비롯하여 나머지 사람들도 알지 못할 긴장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비단 상만천의 몸에서 뿜어지는 은근한 위압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상만천은 평범한 마의를 입고 있는 보통체격의 단순한 부호는 아니었다. 마주보고 있는 사람들을 공연히 위축시키는 상만천의 위엄은 타고난 기질인지도 몰랐다.

"하나는 솔직히 여러분들이 이미 용추선생의 사고를 알고 있지 않나 생각했소."


@BRI@불쑥 말을 던져 시험을 해보았다는 의미다. 그것은 상만천으로서는 당연히 확인해야 할 일이었을지 모른다. 만약 이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 어제 용추의 사고에 이들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란 점이었다. 또한 그렇지 않다 해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자신이 믿고 동행한 자신의 식솔 중에 입이 빠른 자가 있든가 아니면 이들과 연관이 있는 자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언제나 신중한 상만천다운 발상이었다.

"알 리가 있었겠습니까?"

함곡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대가 자신을 시험해 보았다는 점에서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함곡이 이리 즉각적으로 그런 표정을 내비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표정 하나, 말 한마디에 창검을 들고 하는 싸움보다 더욱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양해하시라고 부탁드리지 않았소?"

확실히 상만천은 매우 신중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방면이든지 그저 운 좋게 정상을 오른 자는 없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어떤 것인지요?"

함곡은 의외로 상만천이 원하는 데로 따라주고 있었다. 사실 풍철한이 좀 나서서 뭔가 해주어야 하는데 지금 풍철한은 이상하게도 선화의 눈치를 살피기도 바쁜 것 같았다.


"나로서는 사실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하게 된 것뿐이오. 더구나 아무래도 이번 일은 함곡선생이나 풍대협의 도움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소."

"심각한 문제로군요."

무언가 감을 잡은 듯 함곡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을 받았다. 함곡을 바라보는 상만천의 눈빛에 감탄의 기색이 어렸다. 역시 함곡이다.

"이제 어떤 사고인지 아신 것 같구려."

"용추께서는 과거 구룡의 무공 중 옥룡의 옥음지를 익히고 있었겠군요. 또한 거동을 못할 정도라면 첩인장(疊燐掌)에 당해 부상을 입었을 테구요."

고개를 끄떡이며 함곡을 바라보는 상만천의 눈에 감탄의 기색이 더욱 짙게 떠올랐다. 그리고는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것이 용추의 사고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을 감탄시키고 있는 함곡이란 인물을 얻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는 상만천만이 알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좌중은 기절할 정도로 놀랄 말이었다. 일개 문사로 알고 있던 용추가 구룡 중 옥룡의 독문비기를 익히고 있다니…? 그것도 놀랄 일인데 옥음지라면 바로 어젯밤 살해된 신태감의 사인이 아니던가? 더구나 용추가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심각한 중상을 입은 것이 첩인장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너무나 명약관화(明若觀火)하지 않는가?

좌중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상만천이 짐을 벗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이제 말하기 편해졌구려."

명백한 시인이었다. 좌중은 또 한 번 경악했다. 상황이 갑자기 급변하고 있었다. 분명 오늘 아침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신태감을 시해한 범인이 용추였다는 결론이었다. 용추와 그 동조자가 신태감을 공격했을 것이란 생각은 이미 추측을 지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함곡은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가볍게 탄식을 불어냈다.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신태감께서 어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기습을 받았고, 청룡각에 돌아와서 살해되었습니다. 그 흉수 중 하나가…."

경후의 말에 의하면 신태감은 분명 누군가에게 기습을 당했고 바로 상만천이 머무는 연무장 쪽으로 도망을 갔다고 했다. 그 자를 쫓자 옥음지를 익힌 자와 철담과 같은 기이한 창을 쓰는 자가 나타나 신태감을 공격했고, 그 흉수 중 하나가 신태감의 첩인장에 격중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든 정황이 용추가 흉수 중 하나라고 외치고 있었다. 마치 철담의 살해 현장에 운중보주가 흉수라고 외치고 있듯이 말이다.

"용추선생은 그럴 사람이 아니오."

변명이었지만 담담한 어투였다. 용추가 신태감의 시해사건에 연루되었다면 상만천 역시 그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더구나 상만천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상대인께서도 옥음지를 익히셨습니까?"

함곡의 질문은 매우 애매하기도 하고 교묘하기도 했다. 확실히 상만천이 옥음지를 익혔는지 여부는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세 군데의 옥음지 흔적 중 나중에 생긴 옥음지의 흔적이 다르다고 밝혀졌기 때문에 상만천 당신도 직접 관여했느냐는 질문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익히지 않았소."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사실 상만천이 옥음지를 익혔다 해도 지금의 상황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익혔다고 대답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구룡의 다른 독문비기를 익히셨겠군요."

묻는 것이 아니라 단정이었다. 이것 또한 구룡 중 화룡의 염화신공에 죽은 신태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순간 상만천은 무어라 반박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차피 부인한다 해서 믿어줄 리도 없을 터이고, 더구나 변명을 하다 보면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지금 함곡이 여전히 자신을 흉수 중 한 명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상만천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느새 주도권은 상만천에게서 함곡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풍철한은 내심 걱정스러웠다.

아직 주도권을 잡을 때가 아니다. 장사로 잔뼈가 굵은 상만천은 노회한 인물이었다. 먹이를 던져주고 그것을 물으면 느긋하게 기회를 기다리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상대로 함곡이 서두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왜 용추와 관련된 일이라면 저렇듯 서두르는 것일까?

"동창에 변명할만한 꺼리라도 만들어 놓아야 하시겠군요."

"아직 변변한 변명꺼리를 찾지 못했소. 시각과 흔적…, 변명하기엔 너무나 완벽해 차라리 변명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 생각하고 있소."

"동창에서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겁니다."

함곡의 말은 은근히 상만천을 두둔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오히려 목을 죄는 말이었다. 상만천 역시 모를 리 없지만 그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누군가가 설치한 아주 완벽한 덫에 걸려들었소.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면 더 옥죄어지는 교묘한 덫에 말이오."

누가 듣는다면 아주 절망스런 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상만천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러한 곤경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중원 최고의 부호라 하지만 나라의 권력이 동창 한 곳으로 몰려 있는 작금의 상황으로 본다면 그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그동안 축적한 온 재산을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일가친척은 물론 구족까지 화를 당할 형국에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별로 걱정하시지는 않는 것 같군요."

"나는 이보다 더 심한 곤경에 빠진 적이 있었소."

"믿는 사람이 있으신 게지요."

"그렇소. 나는 지금 이 곤경으로부터 나를 무사히 벗어나게 할 두 사람을 알고 있소."

잠시 말이 끊겼다. 상만천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좌중은 이제야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상만천은 함곡과 풍철한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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