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더니..."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진정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

등록 2006.12.12 13:19수정 2006.12.12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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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호철 군의문사진상규명위 상임위원이 96년 10월 22일 강원도 한 경비교도대에서 사망한 박정훈(당시 21세)씨의 사망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호철 군의문사진상규명위 상임위원이 96년 10월 22일 강원도 한 경비교도대에서 사망한 박정훈(당시 21세)씨의 사망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BRI@취침 점호 후 욕설, 머리·가슴 등 구타, '먹기사역', 성추행….

군 복무 중 사망 사건에 대한 원인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망원인이었던 '만성적 우울증', '사회적 고립경향' 등이 아니었다.

대통령 직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 이하 군의문사위)는 12일 오전 서울 중구 남창동 대한화재 빌딩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6월 접수된 의문사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군의문사위는 "이번에 밝혀진 사건들은 사망 당시 군수사당국의 부실한 수사와 해당 부대의 축소·은폐 사실이 드러난 전형적인 군의문사 사건들"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발표한 두 사건은 지난 6월 진정이 접수된 것으로 ▲1996년 10월 22일 강원도의 한 경비교도대에서 사망한 박정훈(당시 21세)씨 사례와 ▲1980년대 강원도 전방의 한 부대에서 사망한 정민우(가명, 당시 20세)씨 사례다.

[Before&After] "우울증으로 인한 투신 자살"→"가혹행위 견디다 못해 투신"

a 96년 10월 22일 강원도 한 경비교도대에서 사망한 박정훈(당시 21세)씨의 아버지가 그동안 힘들었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96년 10월 22일 강원도 한 경비교도대에서 사망한 박정훈(당시 21세)씨의 아버지가 그동안 힘들었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박정훈씨는 지난 1996년 강원도의 한 경비교도대에서 복무하던 중 배치 4일 만에 사망했다. 당시 밝혀진 사인은 얼굴 피부병으로 인한 우울증과 내성적 성격으로 인한 투신 자살. 하지만 부친인 박노상씨는 "당국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며 지난 6월 17일 진정을 제기했다.


군의문사위 조사 결과, 박씨는 전입 당일부터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했고, 취침 점호 이후에는 선임대원들의 욕설과 구타를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박씨를 비롯한 신입 대원들은 매 끼니 때마다 강제로 세 명이 먹어야 할 분량을 먹어치워야 하는 '먹기사역' 등을 당했다. 일부 관계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선임대원들은 후임대원들의 옷을 벗겨 성기를 만지는 등 성추행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는 결국 이같은 가혹행위를 참지 못하고 사망 당일 동기병들과 함께 교정아파트 옆 미루나무 제거작업 도중 선임대원의 지시로 물 심부름을 하러 가는 길에 이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 자살했다.


군의문사위는 "박씨는 구타와 식사 강요 등으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악화돼 자살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4조에 따라 직무수행 중 사망한 자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또한 "사건 직후 진정인이 경비교도대 측에 구타 등을 문제제기했음에도 당국은 의혹을 밝히는 데 소홀했다"며 "당시 선임대원들이 박씨의 동기들에게 구타나 가혹행위에 대해 묵비하라고 강요한 증언도 다수 확보했다"고 전했다. 당시 보안과장과 소대장, 해당 선임대원들은 이같은 사실을 강력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씨의 부친이자 진정인인 박노상씨는 "정훈이는 입대 당시 고교 2학년 때부터 앓던 알레르기성 피부염으로 피부과 처방약을 복용하고 있었지만 우울증은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사망 전날 아들은 전화통화에서 '근무가 힘들어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고, 다음날 병원에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부친인 박씨는 "지금이라도 동료들이 양심선언을 해줘서 고맙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아들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또한 "현장 답사 결과 아직도 내무반 상황은 엉망이었다"며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고 당부했다.

[Before&After]"음주 후 취침 도중 질식사"→"가슴 부위 구타로 인한 사망"

a 진정을 제기한 한 유가족들이 아들의 사진을 보며 오열하고 있다.

진정을 제기한 한 유가족들이 아들의 사진을 보며 오열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1980년대 사망한 정민우(가명)씨의 경우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헌병대는 "중대원 회식에서 막걸리를 마신 후 취침 도중 음주 취기로 인한 구토로 질식사했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30여년이 지나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A씨가 당시 조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다. 진짜 사망원인은 선임하사가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로 가슴 부위를 3~4대 주먹으로 때린 뒤 정씨가 곧바로 쓰러져 사망했다는 것.

군의문사위가 부대 동료, 군 관계자들을 면담하고 전문가의 자문, 현장조사를 실시한 결과도 진정인의 주장과 일치했다. 군의문사위는 "법의학적 감정을 한 결과 사인은 기도내의 위내용물 역류로 인한 질식사가 아니라 가슴 구타에 의한 심진탕 내지 원발성쇼크로 구타 직후 단시간 내에 사망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정씨 사망 이후에는 군당국의 인사계 상사가 정씨의 동료들을 불러 "타살"이라며 "우리들이 알아서 처리할테니 함구하라"고 은폐를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군의문사위는 ▲구타 당사자인 선임하사가 사건 당시 구타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지만 조사가 진행되지 않은 점 ▲ 군당국의 인사계가 해당 선임하사를 근무태만으로 사건을 조작해 영창에 보낸 뒤 종결한 점 등을 들어 사건이 은폐됐다고 밝혔다. 30년 전 사건이지만 군의문사위는 정씨의 사망에 대한 재심의가 필요하다고 판단, 국방부장관에게 관련 내용을 제안할 예정이다.

김호철 상임위원은 "위원회가 범죄혐의를 확인해 고발하거나 수사를 의뢰할 수 있지만, 모두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라 후속 조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및 보상 조치 또한 군의문사위가 국방부장관에게 요청을 해야 가능하다. 김 상임위원은 이에 대해 "전역한 복무자에 대한 지휘감독권은 국방부장관에게 없기 때문에 입법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다른 군의문사 사건 유가족들의 오열

이해동 위원장은 "사건 은폐와 헌병대의 부실한 조사가 발생한 원인 중 하나는 사망사고의 진상을 철저히 밝히기 어려운 군수사기관의 구조적 문제"라며 "군수사기관의 조사 여건과 조사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지속적인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군의문사위는 지금까지 282건 진정 접수를 받았고, 이 가운데 164건에 대해 사전 조사를 거쳐 본조사를 진행 중이다. 군의문사 진정 접수는 올해 12월 31일로 마감된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군의문사 진정을 제기한 유가족들이 참석해 군의문사 조사가 늦게 진행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이들은 "왜 80년대 사건에 대해서는 조사하면서, 지난해 사건에 대해서는 결과가 없느냐", "우리 아들은 자살이 아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군의문사위가 이번에 밝힌 두 사건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이 가능하며, 가해자나 사건 관련자에 대한 민사소송 제기도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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