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희 여사님, 모란 그림 한 점 그려 줄랑교?

그림 그리기를 배우는 우리 옆집 아줌마, 멋집니다

등록 2006.12.18 10:03수정 2006.12.18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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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2월 15일) 낮이었다. 개가 짖기에 내다보았더니 옆집 아줌마가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줌마는 운동하러 가는 길인지 운동 가방을 들고 있었다.


"운동하러 가는 길에 보니까 자기 차가 있기에 들어와 봤지."
"아유, 아줌마 운동 가는 길이세요? 일단 들어오셔서 차 한잔 하고 가세요."

나는 아줌마의 팔짱을 끼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옆집과 우리 집은 진입로를 같이 하고 있는 이웃이지만 우리 집에서는 옆집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집과 옆집 사이에는 자그마한 둔덕이 있어서 옆집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놀러가지 않는 이상에는 옆집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옆집 아줌마 최옥희(58) 여사는 경상도 사투리를 억세게 쓴다. 서울생활 30년이 넘었는데도 여태 사투리를 못 고쳤단다. 드라마 속에서나 들어보던 '하모, 하모(그럼 그렇지)' 같은 말이나 '뭐시고?(뭐야?)' 같은 순수 경남 사투리들을 거침없이 내뿜는다.

"내 보고 풀 뽑으라 카지 마소"


하늘을 시원스럽게 그린 이 그림은 아줌마의 마음 자리 같기도 하네요. 뭐든 시원시원하게 생각하거든요. 작품 앞에 선 최옥희 여사입니다.
하늘을 시원스럽게 그린 이 그림은 아줌마의 마음 자리 같기도 하네요. 뭐든 시원시원하게 생각하거든요. 작품 앞에 선 최옥희 여사입니다.이승숙
키가 늘씬하게 큰 아줌마는 나와는 1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웃사람이지만 이야기 나누다 보면 나이 먹은 사람 같지가 않다. 아줌마는 남들에게 자신을 잘 보이기 위해 포장하거나 감추지를 않고 있는 그대로 다 보여준다. 그리고 웃사람이라고 아랫사람을 가르치려고 한다거나 위세를 부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줌마랑 이야기 나누면 꼭 또래 친구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우리가 강화 땅을 보러 다닐 때, 보는 땅마다 우리보다 한 발 먼저 보고 간 사람이 있었다. 땅을 소개해주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정년퇴직을 앞둔 어떤 분이 땅을 보러 다닌다 하였다. 그런데 우리 두 집은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서로 옆에 땅을 구해서 정착을 했다. 그리고 이웃이 되었다.


처음에는 아저씨 혼자만 내려와서 지내는 거였다. 아줌마는 시골살이가 싫다시며 내려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게 3년을 아저씨 혼자 서울과 강화를 오가며 지내다가 드디어 재작년 가을에 아줌마도 서울생활을 접고 강화로 내려왔다.

강화로 이사 오기 전에 아줌마는 아저씨와 단단히 약조를 했다고 한다.
'내는 풀 뽑고 밭일 하미 몬 사이까네 함부레 내한테 밭일하라고 카지 마라. 그리고 내는 일주일에 두 번은 서울 나가야 되이까네 내보고 서울 나간다고 뭐라 카지 마라. 이거 두 가지만 지켜주마 내 강화 내려가꾸마.'
이렇게 단단히 약조를 받은 후에 아줌마는 드디어 강화로 내려왔다.

아줌마는 정말로 밭일에는 취미가 없다. 풀 뽑고 야채 가꾸는 일은 모두 다 아저씨가 한다. 그래서 가끔씩 아저씨랑 다투기도 한다.

"옆집 영준이 엄마 함 봐라. 저래 풀 뽑고 하니까 얼매나 보기 좋노? 당신도 좀 풀 뽑고 그래봐라."

옆집 아저씨가 풀을 뽑는 나를 보고는 아줌마에게 뭐라 그러면 아줌마는 단칼로 내쳐 버린다.

"뭐라 카능교? 낼로 보고 풀 뽑으라 카능교? 내는 그래 몬하이까네 당신이나 마이 하소. 내는 내 좋아하는 거 하고 당신은 당신 좋아하는 거 하기로 그래 해놓고 인자 와서 밭일하라 카마 낼로 우야라고? 내는 그래 몬 사이까네 그래 아소."

그림 배우고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입니다. 모란은 부귀와 풍요를 상징한답니다.
그림 배우고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입니다. 모란은 부귀와 풍요를 상징한답니다.이승숙
풀 뽑는 것도 싫고 밭일 하는 것도 싫어했던 아줌마가 어느 날부터 풀을 뽑기 시작했다. 잔디밭에 있는 야외탁자에 앉아서 차를 한 잔 마시는데 잡초들이 눈에 뜨이더란다. 그래서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뽑기 시작했는데 하다가 보니 일이 재미가 있더란다. 그 이후로 아줌마는 잔디밭이나 화단의 풀은 뽑아준다. 그러나 여전히 밭일은 안 한다.

"전생에 내가 좋은 일을 많이 했나 봐"

어느 날 아줌마가 그랬다.

"아침 먹고 차 한 잔 마시면서 들판 바라보면 내가 무슨 복이 이래 많노 하는 생각이 다 든다 아이가. 내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했나 봐. 그러이까네 이래 평화롭게 잘 지내제."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이렇게 평화롭게 잘 지낸다는 아줌마의 말이 내내 기억에 남았다.

아줌마는 지난 봄부터 그림 그리는 일에 취미를 붙였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는데 친정아버지가 딸은 밖으로 내돌리면 안 된다며 외지에 있는 대학에 보내주지 않았단다. 그래서 미술대학 가고 싶은 꿈을 접었다고 그랬다. 그런데 지난봄부터 문화센터에 다니면서 유화를 배우고 있다. 팔레트에다 물감을 눌러 짜서 그림을 그리는 아줌마 모습은 보기 좋았다.

아줌마는 모란꽃을 즐겨 그린다. 검붉은 모란이 아줌마 손을 통해서 피어난다.

"모란은 부귀를 상징한대. 내가 모란 그림 그려서 딸도 한 점 주었어."

시집간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모란 그림을 그려서 주었단다.

옆집 사시는 아줌마와 아저씨가 나란히 앉았습니다. 아저씨(한수갑 씨, 63세)는 강화로 이사오신 뒤 문화유산 해설사 공부를 하셔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옆집 사시는 아줌마와 아저씨가 나란히 앉았습니다. 아저씨(한수갑 씨, 63세)는 강화로 이사오신 뒤 문화유산 해설사 공부를 하셔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이승숙
강화군 여성문화회관에서는 강화군의 여성들을 위한 다양한 취미, 자기 개발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그 중 수채화반 수강생들의 작품 전시회가 12월 14일부터 열리고 있다. 아줌마도 지난봄부터 그림 그리기를 배우고 있는데, 이번 전시회에 그동안 그린 그림 중 3점을 출품했다고 한다.

"아줌마, 전시회해요? 그라마 내가 꽃다발 사가지고 놀라갈게요."
"아이고 무신 소리 하노? 그양 오마 되지 뭐할라꼬 꽃을 사올라 카노? 그양 놀러만 온나."
"내는 잘 몬 그리는데 잘 그리는 사람 많아. 수채화 그린 거 보마 얼매나 잘 그맀는지 몰라."
"아이 무슨 소리예요? 잘 그리고 못 그리고가 어디 있어요? 내가 좋아서 그렸으면 다 잘 그린 그림이지 못 그린 그림이 어디 있어요?"
"그래도 보러 온다 그러니 좀 부끄럽네."

말로는 오지 마라 그랬지만 아줌마 얼굴에 꽃이 피었다.

일요일 낮에 강화읍내에 있는 전시회장을 찾아 가봤다. 눈이 온 다음 날이라서 그런지 관람객은 별로 없었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전시회장 안에는 회원들의 그림이 다소곳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불혹을 넘기고 지천명을 보낸 주부들이 손에 붓을 들었다. 집안 살림을 하던 그 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만은 오롯이 나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다. 그림 한 점 한 점마다 그린이의 정성과 마음이 들어 있는 듯하였다. 그 속에서 행복해 하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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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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