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때기와 쫄때기, 들어보셨나요?

[달내일기 87] 가끔씩 추억을 만들어 먹으면 행복합니다

등록 2006.12.18 13:07수정 2006.12.1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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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보름 전에 수확한 고구마를 꺼내 씻었다.


작년엔 심은 곳이 고구마가 잘 안 되는 토양이었는지 대부분 갈라진 채로 나온 데다 양도 얼마 안 됐다. 그래서 올해는 자리를 옮겨 감나무 아래 밭에 심었더니 알도 굵고 양도 많았다. 두 자루쯤 나왔다.

역시 고구마는 '씨보다 밭이 중요하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그래도 올 겨울을 지내려면 아무래도 좀 부족할 것 같아 손위 동서집에서 두 자루 더 얻어왔다.

새삼스럽게 고구마에 욕심내는 걸 보고 아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어찌 알랴. 올 겨울 손님 대접할 때 홍시가 부족해서 고구마로 때울 생각임을. 손님뿐 아니라 당장 군것질거리로 고구마보다 더 좋은 게 있으랴. 삶아서 먹고, 구워서 먹고, 밥에 넣어먹고….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혹은 누워서 삶아온 고구마 껍질을 벗겨가며 먹는 맛. 아궁이에 불 지피면서 짬짬이 불길을 살펴가며 구워먹는 맛. 밥 속에 든 누런 고구마를 향해 숟가락을 전진 후퇴시킬 때의 그 맛.

고구마를 캐낸 뒤 바로 저장하는 것보다 한 이틀 말려서 저장하는 게 좋다. 그리고 저장할 때는 반드시 찬바람을 막을 수 있는 따뜻한 곳이어야 한다.
고구마를 캐낸 뒤 바로 저장하는 것보다 한 이틀 말려서 저장하는 게 좋다. 그리고 저장할 때는 반드시 찬바람을 막을 수 있는 따뜻한 곳이어야 한다.정판수
그러나 오늘 고구마를 씻은 건 구워먹거나 삶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빼때기'와 '쫄때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빼때기는 날고구마를 무 자르듯 얇게 비스듬히 잘라 햇볕에 말린 것이다. 빼때기란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그게 우리말이 아니라 일본말이나 중국말인가 하고 갸우뚱하는데 경상도 말이다. 아니 제주도에 가서도 들었으니 순수 경상도 말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전에 먹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아 그거…'하시며 고개를 끄덕일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 빼때기는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섬 지역이나 서부 경남에서는 겨울부터 이른봄까지 주요 군것질거리이면서 죽으로 만들어먹기도 했으니 한 끼 식사였다.


이제 가만 생각해보면 빼때기를 많이 먹었던 곳은 고구마 외에 다른 작물을 심기 힘든 섬이나 유독 고구마가 잘 자라는 지역이 틀림없다. 거기 사람들에게 고구마는 주식이었으니 보관할 방법을 찾느라 무진 애를 썼으리라. 자칫하면 썩거나, 곰팡이가 피거나, 쥐의 입 속으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고구마를 썰어서 말린 상태로 보관하는 것이었으리라.

빼때기는 타박고구마가 좋은데 바짝 말랐을 때 그냥 먹어도 되고, 팥을 넣고 죽을 끓이면 먹을 만하다. 옛날 양식이 부족할 때 밥 대신 먹기도 했다.
빼때기는 타박고구마가 좋은데 바짝 말랐을 때 그냥 먹어도 되고, 팥을 넣고 죽을 끓이면 먹을 만하다. 옛날 양식이 부족할 때 밥 대신 먹기도 했다.정판수
현재는 고구마의 종류를 어떻게 나누는지 잘 모르지만 나 어릴 때는 타박고구마와 물고구마 둘뿐이었다. 그 중에 타박고구마를 말리면 빼때기가 되지만 물고구마를 바로 말리면 그 풍부한 물기 때문에 바로 쪼그라들어 볼썽사납게 된다.

우리 어른들은 그걸 극복하려고 꾀를 내 물고구마는 썰어 말리지 않고 삶아 말렸다. 이때 주의할 점은 완전히 말려서는 안 되며, 수분이 조금 남은 약간 까들까들한 상태일 때가 가장 맛있다.

이렇게 물고구마를 삶아 뭉텅뭉텅 썰어 말린 걸 쫄때기라 한다. 이 쫄때기의 맛은 빼때기와 다르다. 빼때기의 매력이 구수함에 있다면, 쫄때기의 매력은 달큼함에 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빼때기는 알아도 쫄때기는 모르는 이가 많다.

아니 사실 '쫄때기'란 말을 아는 이는 많다. 그러나 이때의 쫄때기는 쫄따구의 변형으로 군대에서 '졸병'을 가리키는 은어로 알고 있거나, 옛날의 문방구점에서 아이들에게 불티나게 팔리던 불량과자인 '쫀득이'의 딴말로 알고 있을 뿐.

쫄때기는 물고구마로 만드는데 너무 바짝 말리지 않고 약간 까들까들한 상태일 때 거둬 먹으면 되고, 많을 때는 냉동실에 넣어두면서 꺼내 먹으면 된다.
쫄때기는 물고구마로 만드는데 너무 바짝 말리지 않고 약간 까들까들한 상태일 때 거둬 먹으면 되고, 많을 때는 냉동실에 넣어두면서 꺼내 먹으면 된다.정판수
혼자 씻어 칼로 자르고, 삶고, 말리며 싱글벙글하는 모습에 아내가 '또 병 도졌네'하는 눈길을 보낸다. 그래도 좋다. 시골로 이사 오기 전 도시 살 때도 해마다 겨울 길목에 이 짓(?)을 했으니 말이다. 이제 보름쯤 뒤면 빼때기와 쫄때기가 완제품이 돼 거실 쟁반에 담길 것이다. 그러면 심심할 때마다 손이 갈 게고.

지금 바로 눈앞의 쟁반에 빼때기 쫄때기가 놓인 듯하여 나는 다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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