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언제나 위기였지만 결코 위기 아니다"

[인터뷰] <니코마코스 윤리학> 완역한 김재홍 박사

등록 2006.12.18 20:02수정 2006.12.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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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재홍 박사

김재홍 박사 ⓒ 정빈나

2006년 11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완역됐다. 필자들은 지난 8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연구동 4층 정암학당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 번역자인 김재홍 박사를 만나 번역의 의의와 한국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김 박사의 목소리에는 유달리 힘이 들어가 있었다.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정신적인 성장이 반비례한다, 고전을 읽는 역량을 향상시켜야 한다" 김 박사의 목소리에는 한국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다음은 김 박사와 나눈 대담 내용.

- 정암학당을 소개해 달라.
"정암학당은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 희랍 고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모임이에요. 1년에 몇 권씩 계획을 세워 2010년까지 플라톤 전집을 간행하려 해요. 가독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할 예정이에요. 사람들의 사회적 삶에서 대화와 이해의 바탕을 길러주는 힘은 인문학에 있어요. 동서 고전을 읽는 건 사유와 비판, 언어와 논리를 훈련시킬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연차별로 플라톤의 작품을 강독하고 결과물을 내려 해요."

- 지적 인프라 구축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인프라가 중요해요. 그걸 위해 중요한 게 고전 번역이에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이 번역된 편수가 OECD국가 중에서도 우리나라가 최하위권이에요. 사람들도 그래요. 1년에 0.8권 읽고, 하루에 8분밖에 책을 안 읽어요. 세계에서 126위에요. 책도 안 보는 나라, 정신이 척박한 나라예요. 경제가 발전하는 만큼 정신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요. 정신적 향상을 위해서라도 고전을 읽는 역량을 향상시켜야 해요. 그게 정암학당의 목적이라고 생각해요."

@BRI@- <니코마코스 윤리학> 완역 소감은.
"이젠 너무 많이 읽어서 보기만 해도 싫죠. 고전 읽기는 대단히 어려워요. 희랍철학은 대단히 분석적이고 정확하고 극한까지 밀고 가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더 어렵죠. 플라톤의 경우 외국어만 10종이 넘는 판본이 있는데, 중요한 건 역자가 희랍어 원전을 어떻게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느냐는 것이겠죠. 번역에는 어쩔 수 없이 옮긴이의 의도가 어느 정도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해요. 번역은, 특히 희랍어 원전 번역은 단순히 텍스트만 소개하는 식으로는 안 돼요. 그 안에 들어있는 자세한 의미들을 잘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번역의 가치를 잘 모른다는 거예요. 특히 서양고대철학의 경우 고전을 읽지 않고 짜깁기 식으로 리포트 쓰듯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논문이 아녜요. 희랍어 원전을 번역해 보지 않고서 논문을 쓴다는 건 가짜예요."

- 완역본과 기존 번역본의 차이점은.
"그동안 나온 번역본은 영어판의 중역이었어요. 지금까지 그게 서양고대철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동안 변화에 발맞추고 후학들의 연구역량 향상에 부응하기 위해 새 판본이 나와야 해요. 고전에 관한 한 번역은 계속돼야 해요. 변화에 부응하고 학문적 역량의 축적을 위해서도 필요해요. <니코마코스 윤리학> 같은 책도 그래요. 판본이 많을수록 그에 발맞춰 독자들의 상상력과 사고력도 증진돼요. 판본 사이의 차이점을 보고 그에 대해 의문을 품고 원전을 보면서 말예요. 서양현대철학의 경우에도 고전을 모르면 2, 3류예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을 모두 읽어본 학자들이 1류가 될 수 있는 거예요."


a 서양철학 도입 후 100여 년 만에 완역된 <니코마코스 윤리학>

서양철학 도입 후 100여 년 만에 완역된 <니코마코스 윤리학> ⓒ 이제이북스

- 판로는 어떻게 확보했나.
"연구자 모임도 기금을 마련해야 하고 더 발전해야 해요. 그러니까 번역한 성과물을 출간도 하는 거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출판사들이 서로 내려고 해요. 좋은 책을 출판했다는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인문학 서적을 출간하는 일이 출판사 차원에서도 자랑스러운 일이 될 수 있어야 해요."

- 번역하는 동안 겪은 어려움은.
"고전 번역엔 대단히 시간이 많이 걸려요. 특히 희랍철학의 정확성과 엄밀성, 극단적으로 분석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더해요. 교수들은 업무나 기타 잡일들 때문에 번역에 진득하게 달라붙지를 못해요. 우리 연구원들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성과를 낼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 그 점에서는 유리하죠. 경제적인 게 문제인데, 최근에는 학술진흥재단에서 번역에도 상당히 지원해 줘요."


- 학술진흥재단에서 어떤 지원을 받았나.
"여러 가지예요. 연구교수직도 있고, 번역 자체를 지원해 주는 경우도 있고, 연구원 자리도 있고. 우리가 바라는 게 있다면 인문학 지원을 더 확대해줬으면 하는 거예요. 기초 연구를 하는 이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조가 탄탄해야 한다는 거예요. 인문학은 하루 이틀에 성과를 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연과학에선 천재 한 사람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성과를 낼 수 있어요. 하지만 인문학의 힘은 달라요. 텍스트를 오래 본 이들의 힘이 바로 인문학의 힘이에요. 오래 된 생강이 맵다고 그러잖아요. 인문학의 힘은 오래된 고전을 읽는 것에서 나와요. 학생들이나 시민들도 고전에 관심을 두고 읽는 풍토가 조성됐으면 좋겠어요. 사회적으로 인문학 소양이 모자라니까 정치나 경제 방면에서도 정신적인 천박함을 드러내는 거예요. 정치를 보세요. 토론이 없고 야만적으로 힘 싸움이나 벌이고, 이데올로기적 당파성 다툼이나 벌이고 그러잖아요. 인문학적 풍토에서 우러나오는 이성적인 토론이 부족하잖아요."

- 일반인들에게 고전을 읽도록 하는 방법은.
"어려운 질문이군요. 요즘 학생들을 보면 초중고 내내 입시교육에 찌들려 있는 것 같아요. 입시교육의 논술에선 답만 요구하는 훈련만 요구하는데 그건 옳은 게 아녜요. 스스로 해결하고 문제들을 만들어 보고 극한까지 사고하는 훈련이 필요해요. 사유에는 답이 없어도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어릴 때부터 특정한 답만 요구하는 훈련을 받으면 책 같은 걸 읽을 수가 없어요. 답이 곧장 나오지 않거나, 없다 싶으면 몇 줄 읽고 던져버리잖아요. 어릴 때부터 스스로 사고하고 해결하는 훈련을 받아야만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자신의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교육 구조나 사회풍토가 이런 방향으로 마련돼야 사람들이 고전을 읽게 될 거예요. 그래야 전체 사회의 정신적인 수준이 높아지고, 나아가 정신문화의 성취를 도모할 수 있게 될 거예요."

- '인문학 위기' 담론을 어찌 보나.
"얼마 전 인문학 교수님들이 '인문학 위기 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하셨는데요. 이 선언에 대한 비판은 그게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밥그릇의 위기' 선언이 아니냐는 점에서 비판이겠죠.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취직을 위해 실용적인 공부에 치중하고, 인문계열 학과들이 고사하는 식의 위기를 부정하진 않아요. 그러나 인문학이 어디든 개입할 수 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돼요. 경제나 과학 어디에서든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배어 있어요. 아파트를 사는 경우에도 삶의 질을 중시하느냐, 환경을 중시하느냐 하는 식의 근원적 물음은 계속되는 거예요. 인문학의 위기라면 그런 물음을 경시하고 학문 안에만 안주하고 있는 게 위기인 거예요. 그러나 사실 인문학의 위기는 언제나 존재했어요. 언제나 위기였지만 또한 언제나 위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른 게 아녜요. 다시 인문학 정신으로 돌아가 시대의 정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안주하는 태도를 벗어 던져야 해요. 이 점에서 기존의 교수들은 비판받아야 해요. 출세를 지향하는 태도를 버리고 고유영역으로 돌아와야 해요. 그리고 학제간 연구, 그러니까 춤-인문학, 미술-인문학, 인문학-공학 같은 식으로 학문과 학문의 교류 속에서 다른 학문의 깊이를 배우고, 다른 부문 또한 인문학의 깊이를 배워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는 게 필요해요."

- 학문적인 목표는.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좋았던 건 그거예요. 같이 공부하면서 나눴던 대화, 앎을 교환하고 서로 생각을 파악하면서 나 스스로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어요. 그리고 다른 이들의 인생과 나아가 이 세상에 조그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인 것 같아요.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는 즐거움 이상으로. 그리고 인간이 함께 더불어 가는, 더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게 인문학이에요.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낫고, 내일보다 모레가 더 아름다운 삶을 위해 역사에서 사람들은 싸워왔고 학문의 목적도 그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덧붙이는 글 | ※ 김재홍 박사는 - 숭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고대 그리스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대, 숙명여대, 건국대 등에 출강하였으며 가톨릭대 인간학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는 고대 그리스 철학 연구모임인 정암학당을 운영하고 있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대표적인 윤리학 저작이다. 서양의 윤리적 사상의 집결이자 정수인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학당인 ‘리케이온’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썼던 강의노트를 그의 아들인 니코마코스가 정리하였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이라는 이름 대신에 니코마코스의 이름이 붙여졌다.

※ 김재홍 박사의 인터뷰 전문은 ‘http://blog.naver.com/tach13’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재홍 박사는 - 숭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고대 그리스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대, 숙명여대, 건국대 등에 출강하였으며 가톨릭대 인간학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는 고대 그리스 철학 연구모임인 정암학당을 운영하고 있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대표적인 윤리학 저작이다. 서양의 윤리적 사상의 집결이자 정수인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학당인 ‘리케이온’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썼던 강의노트를 그의 아들인 니코마코스가 정리하였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이라는 이름 대신에 니코마코스의 이름이 붙여졌다.

※ 김재홍 박사의 인터뷰 전문은 ‘http://blog.naver.com/tach13’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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