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은 기념비의 가장 흔한 형상이다.이희동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인천 자유공원은 서울 탑골공원보다도 9년 전인 1888년에 만들어졌으며, 조성될 당시 원래 이름은 '각국공원'이었다.
개화기 시절 주요 개항지였던 인천에는 여러 국가들의 조차지가 있었는데, 인천항과 함께 그곳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로서 지금의 자유공원 자리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따라서 각국들은 그곳에 경쟁적으로 개성 있는 건축물들을 지었고 '각국공원'은 근대문화의 기점으로 그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각국공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을 바꾼다. '만국공원'. '각'과 '만'의 한글자 차이지만 '만국'이란 단어가 담지하고 있는 의미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각국'이 단순히 여러 국가들을 지칭하는 객관적인 단어라고 한다면, '만국'은 새롭게 출발하는 근대국민국가로서 대한제국이 지향하는 바가 더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비록 '조선의 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일본의 필요에 의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할 수밖에 없었던 고종이었지만, 근대서구문명의 도입과 함께 근대국가체제를 지켜본 고종은 주권국가로서의 대한제국을 꿈꾸었다. 이는 20세기 초 고종을 위시한 집권층들이 주도했던 개혁들을 보더라도 확연히 드러난다. 고종은 온갖 제도개혁과 교육 등을 통해 조선의 백성들을 충성스러운 대한제국의 국민으로 변환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근대국민국가 체제 속에서 대한제국을 떳떳한 주권국가로서 자리매김하고 싶어 했다.
'만국'이란 단어는 이와 같은 의지의 표상이다. 그 시절 국민을 만들어내는, 근대의 또 다른 첨병인 학교에서 열리는 운동회의 풍경을 보자. 그곳에 만국기가 펄럭이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만국기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태극기는 곧 대한제국이 주권국가로서 세계만방과 어깨를 견줄 수 있다는 암시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서울 장안의 학교에서 펼쳐지는 운동회를 국제적 행사로 만들었으며, 국가 관료의 참여는 물론 각국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했다. 국가는 운동회에 참석한 조선의 백성들에게 장엄한 운동회 예식과, 각국의 인사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 있는 국가 관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대한제국 국민으로서의 애국심을 강요했다.
결국 '만국'은 대한제국의 못 다 핀 꿈의 상징이며, 그 이름을 내걸고 각국의 조차지를 내려다보는 '만국공원'은 근대국민국가를 꿈꾸던 대한제국의 기념비적 공간이다.
인천 자유공원의 역사: 만국공원에서 자유공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