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원 근처엔 왜 점집이 많을까

인천 자유공원에서 돌아보는 한국근현대사① - 만국공원에서 자유공원까지

등록 2006.12.24 12:43수정 2006.12.24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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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새벽, 쏟아지는 눈을 보고 인천 자유공원 행을 결심합니다.
17일 새벽, 쏟아지는 눈을 보고 인천 자유공원 행을 결심합니다.이희동
@BRI@올 겨울 들어 눈다운 눈이 제대로 내린 지난 17일 일요일. 회사 당직을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 자유공원에 들렀다. 공원 곳곳에서 그 자태를 뽐내는 눈꽃도 보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나의 어렸을 때 사진 속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의 기억을 되새김하고 싶었다.

근 20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 내게 자유공원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인천 자유공원을 서술하기에 앞서 우선 근대 공원의 이야기부터 시작해본다.


근대 공원(公園)의 탄생

공원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지각을 못할 뿐, 공원의 기원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근대 이후이며 우리 사회의 경우 그 역사는 근대가 도입된 이후 100년을 조금 넘는다.

1. 시가지 등에서, 나무나 화초 등을 심고 어린이들의 놀이 시설을 갖추어 만든 시민을 위한 휴식 장소《도시공원 따위》. 2.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보존하여 관광이나 휴식 장소로 지정한 지역《국립공원 따위》

박제된 자연으로서의 공원. 자유공원도 공원입니다.
박제된 자연으로서의 공원. 자유공원도 공원입니다.이희동
공원의 사전적 정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공원은 '시민'이 전제되는 근대도시가 잉태한 공간이며, 자연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걱정할 만큼 근대의 자연파괴가 심해지면서 부각된 개념이다. 어느 유명한 사회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대문명 속에서 자연이 사라진 만큼 자연을 기념코자 만들어진 것이 현재의 공원인 것이다.

공원이 등장하면서 인간이 주거하는 공간과 주거하지 않는 공간으로 나뉘던, 근대 이전의 공간에 관한 이분법적 인식은 무너졌다. 공원은 자연인 동시에 인공이며 사람이 사는 동시에 살지 않는 공간으로서, 자연을 정복하기 시작한 근대체제의 첨병이자 증거이다.


따라서 공원은 근대체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삭막한 회색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공원은 그나마 도시를 인간이 숨 쉴 만한 곳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비록 박제화된 자연이지만 공원은 주거환경의 질을 평가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지표로, 도시녹지율을 높여주며 그에 따라 전 국민의 관심사인 땅값을 올려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인천 자유공원 곳곳에 전시되어 있는 상징. 전쟁은 기념의 가장 중요한 대상입니다.
인천 자유공원 곳곳에 전시되어 있는 상징. 전쟁은 기념의 가장 중요한 대상입니다.이희동
그러나 공원의 존재적 의미를 단순히 도시녹지율과 땅값만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공원은 근대체제 속에서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공원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


공원은 근대국민국가가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온갖 종류의 기념비들로 가득하다. 근대국민국가는 체제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계몽시키기 위해 기념비들을 만들며, 모든 국민들이 평등하게 그 공간을 소비할 수 있음을 홍보하고 권장한다. 우리는 우리가 공원을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체제는 공원과 그 내부의 기념비들을 통해 체제가 필요로 하는 '국민'이나 '시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원에서 마주치는 큼지막한 구조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공원의 상징성은 오래된 공원일수록 강하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거의가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그때야 말로 공원을 통한 계몽이 가장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인천 자유공원이나 서울의 탑골공원 등은 지금까지도 근대국민국가의 첨병으로서 온갖 조형물들과 함께 그곳을 찾아오는 이들을 계몽하고 있다.

인천 자유공원의 역사: 각국공원에서 만국공원으로

탑은 기념비의 가장 흔한 형상이다.
탑은 기념비의 가장 흔한 형상이다.이희동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인천 자유공원은 서울 탑골공원보다도 9년 전인 1888년에 만들어졌으며, 조성될 당시 원래 이름은 '각국공원'이었다.

개화기 시절 주요 개항지였던 인천에는 여러 국가들의 조차지가 있었는데, 인천항과 함께 그곳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로서 지금의 자유공원 자리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따라서 각국들은 그곳에 경쟁적으로 개성 있는 건축물들을 지었고 '각국공원'은 근대문화의 기점으로 그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각국공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을 바꾼다. '만국공원'. '각'과 '만'의 한글자 차이지만 '만국'이란 단어가 담지하고 있는 의미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각국'이 단순히 여러 국가들을 지칭하는 객관적인 단어라고 한다면, '만국'은 새롭게 출발하는 근대국민국가로서 대한제국이 지향하는 바가 더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비록 '조선의 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일본의 필요에 의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할 수밖에 없었던 고종이었지만, 근대서구문명의 도입과 함께 근대국가체제를 지켜본 고종은 주권국가로서의 대한제국을 꿈꾸었다. 이는 20세기 초 고종을 위시한 집권층들이 주도했던 개혁들을 보더라도 확연히 드러난다. 고종은 온갖 제도개혁과 교육 등을 통해 조선의 백성들을 충성스러운 대한제국의 국민으로 변환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근대국민국가 체제 속에서 대한제국을 떳떳한 주권국가로서 자리매김하고 싶어 했다.

'만국'이란 단어는 이와 같은 의지의 표상이다. 그 시절 국민을 만들어내는, 근대의 또 다른 첨병인 학교에서 열리는 운동회의 풍경을 보자. 그곳에 만국기가 펄럭이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만국기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태극기는 곧 대한제국이 주권국가로서 세계만방과 어깨를 견줄 수 있다는 암시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서울 장안의 학교에서 펼쳐지는 운동회를 국제적 행사로 만들었으며, 국가 관료의 참여는 물론 각국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했다. 국가는 운동회에 참석한 조선의 백성들에게 장엄한 운동회 예식과, 각국의 인사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 있는 국가 관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대한제국 국민으로서의 애국심을 강요했다.

결국 '만국'은 대한제국의 못 다 핀 꿈의 상징이며, 그 이름을 내걸고 각국의 조차지를 내려다보는 '만국공원'은 근대국민국가를 꿈꾸던 대한제국의 기념비적 공간이다.

인천 자유공원의 역사: 만국공원에서 자유공원으로

자유공원의 상징, 맥아더 장군 동상.
자유공원의 상징, 맥아더 장군 동상.이희동
인천 만국공원의 역사는 대한제국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길지 못했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상 '만국'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근대국민국가를 꿈꾸던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독립의 싹을 자르고자 했다. 그런 일제가 만국공원을 가만히 놔 둘리 없었다. 만국공원은 1914년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서공원으로, 야마테 공원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어지러운 해방정국 시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만국공원은 새롭게 태어났다. 새로 탄생한 국가는 새로운 기념비를 원하였고, 이에 발맞추어 만국공원의 거세되었던 상징성이 복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의미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은 그 이름과 구성원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시스템과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7년 만국공원 자리에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전쟁영웅, 미군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공원의 이름은 '자유공원'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한국전쟁을 막 끝낸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었다. 대한제국이 만국공원을 통해 근대국민국가로서의 의지를 발현했다면, 대한민국은 자유공원을 통해 스스로가 반공국가임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최전선으로서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고 있음을 선언했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자유'라 함은 사상 및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초월하는 '빨갱이'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바, 인천 자유공원은 우리식 '자유'에 맞게 꾸며진 것이다. 지금까지도 보수적인 목소리로 그 이름에 '자유'를 표기하고 활동하는 단체들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교과서에서 배운 '자유'와 한국사회에서 사용하는 '자유'의 의미가 다른데서 오는 혼란 때문이다. 앞서 자연이 파괴된 만큼 공원이 강조되듯이, 자유가 없을수록 자유가 강조된다고나 할까?

그리고 자유공원 꼭대기의 맥아더 동상은 그 배경에 미국이 버티고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만국'으로 표현되던 20세기 초 근대의 꿈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질곡을 거치면서 미국식 근대화로 귀결된 것이다. 참여 정부 초 네덜란드나 스웨덴 등 대안의 자본주의 체제가 거론되다가 결국 폐기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결국 우리 내면에 서 있는 맥아더 동상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미국식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자본주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척박한 사회. 상황이 이러하니 국민의 생존권을 걸고 벌어지는 현재의 한미 FTA가 절대 공정한 게임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일 게다.

자유공원을 향한 발걸음

유난히도 '철학집'이 많았던 그 길. 아마도 맥아더 장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유난히도 '철학집'이 많았던 그 길. 아마도 맥아더 장군 때문인 것 같습니다.이희동
동인천에서 자유공원 가는 길.
동인천에서 자유공원 가는 길.이희동
자유공원을 향한 발걸음의 시작은 동인천역에서부터였다. 동인천역에서부터 자유공원 가는 길. 오르막은 눈이 온 터라 발을 떼기 쉽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그 차가운 기운은 오히려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실 때 콧속이 얼어붙는 그 느낌과 그에 비례해 점점 뚜렷해지는 생의 의지.

길 뒤로는 인천 도심의 설경이 펼쳐져 있었고 양 옆으로 유독 많은 철학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당들이 점을 볼 때 최영 등 과거의 장군들을 모신다더니 이곳 자유공원에는 워낙 센 맥아더 장군이 우뚝 서 있기 때문일까? 무엇이 그들을 이곳 자유공원 근처까지 끌어 올린 것일까?

언덕의 끝, 홍예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제가 만들었다는 바로 그 홍예문(虹霓門). 그 무지개 모양의 아치문은 오늘 내가 자유공원에서 마주치게 될 한국 근현대사의 첫머리였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2월 17일 인천 자유공원을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앞으로 한 두번에 걸쳐 더 쓸 예정입니다.

또한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12월 17일 인천 자유공원을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앞으로 한 두번에 걸쳐 더 쓸 예정입니다.

또한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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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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