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일제의 흔적.이희동
어쩌면 우리 역사에 있어서 일제와 근대는 홍예문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처음 일제의 식민지 수탈을 위해 본격적으로 이식되기 시작했던 근대. 그러나 그 불순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시작된 근대화는 우리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것은 전통과의 단절이자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규정짓는 중요한 기본 바탕이 되어 온 것이다.
비록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치적을 위해 구 중앙박물관을 부수고, 독도문제에 불같이 화를 내는 등 일제와의 고리를 끊는 척 과시하지만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실제 우리 사회는 일제시대 때 시작되었던 근대화의 연장선에 서 있으며 아직까지도 그 공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컨대 아직까지 우리사회를 조직하는 주요 논리인 군사주의 역시 일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2006년 한해 학계를 뜨겁게 달궜던 소위 '해방전후사' 논쟁도 결국은 이와 같은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관점 차이다. '식민지 수탈'이라는 근대화의 목적을 감정적으로 중요시하는 이들과 그 목적과는 상관없이 근대화의 결과만을 살피고자 하는 이들의 끝없는 논쟁.
그것은 결국 일제의 근대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가 지고 있는 모순이며, 대안으로서 다른 체제를 상상하지 못하는 경직된 사회가 갖는 한계다. 거론조차 되지 않는 홍예문의 현실과 나와 다른 대안은 모두 불순한 사상으로 몰아가는 양극단의 사회. 아직 우리는 내면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근대의 기념비와 전쟁
홍예문을 지나 자유공원 가는 길. 동인천에서 올라올 때와 달리 길 옆에는 점집 대신 카페들이 들어서 있었다. 아무리 센 맥아더 장군이라 할지라도 결국 자본 앞에서는 무력한 것일까? 덕분에 자유공원은 도심의 휴식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증명하고 있었다.
노을 해가 나무에 걸릴 때 쯤 들어선 자유공원. 처음부터 눈에 띄는 건 역시나 커다란 조형물들이었다. 시대의 기념비. 그 첫 장식은 인천학도의용대에 대한 동상과 탑이었다.
전쟁은 근대의 주요 기념 대상이다. 근대국민국가는 결국 전쟁을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모든 백성들에게 평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대신 전쟁에 참여할 의무를 강제함으로써 국민을 만들어내었고, 국민은 전쟁을 경험하며 타자와 다른 '우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역에 따라 '시민'으로, '민족'으로 '국민'으로 다르게 명명되었지만, 인종, 종교, 계급 등 그 어느 원심력보다도 강한 정체성과 구속력을 띠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주적' 북한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북한이 현실적으로 우리의 위협인가와는 상관없이, 전쟁 속 타자였던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현실적인 위협이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다.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반공, 반북으로 규정해 온 이들이 햇볕정책에 그토록 반대하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정체성 때문인 것이다.
근대국민국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전쟁. 따라서 근대체제의 군대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군대는 전쟁의 주체로서 단순히 국가안보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지키기 때문이다. 각각의 충성스러운 군인은 국민국가에 속해있는 국민의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되며, 군대 그 자체는 국민의 재사회화 기능을 떠맡는다.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들이 자위대를 현실화 시키면서 '보통국가'를 부르짖는 것은 결국 군대 없는 근대국민국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맥아더 장군 동상과 기억의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