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원에 새겨진 대한민국의 만국

인천 자유공원에서 돌아보는 한국근현대사②

등록 2007.01.01 15:56수정 2007.01.01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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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의 상징 홍예문.
식민지 근대화의 상징 홍예문.이희동
일제 식민지근대화의 상징 홍예문

가까이서 본 홍예문은 생각 외였다. 1905년에 착공해 3년이나 걸친 대공사 끝에 완성된 작품치고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기록에 따르면 홍예문 축조는 당대 최고의 난공사로서 땅속에서 암반이 계속 나오고 주위가 낭떠러지로 변해 인부들이 떨어져 죽는 등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고 한다.


@BRI@그러나 그것만으로 3년의 기간을 오롯이 설명할 수는 없는 법. 홍예문 완성에 그토록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어쩌면 일본인이 지휘·감독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날림공사에 익숙한 우리와는 달리 건물 하나를 만들어도 꼼꼼하게 최선을 다해 만드는 그들. 일본이라면 무조건 욕하고 보는 우리지만 사실은 사실로서 인정해야 한다. 서울시청, 한국은행 등 100년 가까운 그 당시 건물들이 아직까지 간간히 사용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05년 홍예문이 들어선 것은 일제의 필요 때문이었다. 일본은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일본의 조계지와 만석동을 직접 잇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서 이곳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홍예문을 만들었다.

일제에게 홍예문은 조선 침략을 위한 통로이자 제국주의로의 경계선이었으며, 당시 조선인들에게 홍예문은 근대화의 통로이자 근대의 경계였다. 이곳 홍예문에 서서 남쪽의 화려한 왜 시가지와 북쪽의 초라한 조선인 마을을 바라보면서 가슴 아팠을 당시의 조선인들. 모든 문이 그렇듯이 홍예문 역시 경계와 소통의 이중적인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10분여 동안 홍예문을 둘러보면서 새삼 놀랐던 것은 무엇보다 홍예문을 지나다니는 적지 않은 차량이었다. 조용히 사진을 찍을 만하면 여지없이 등장하는 자동차들. 비록 홍예문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위해 축조되었지만, 이후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에게조차 매우 유용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그 존재의 편리함은 현재의 인천시민에게로 이어졌다. 기록을 보더라도 홍예문은 인천의 여름철 피서지로, 데이트 장소로, 중요한 길목으로 각광을 받아왔던 것이다.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일제의 흔적.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일제의 흔적.이희동
어쩌면 우리 역사에 있어서 일제와 근대는 홍예문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처음 일제의 식민지 수탈을 위해 본격적으로 이식되기 시작했던 근대. 그러나 그 불순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시작된 근대화는 우리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것은 전통과의 단절이자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규정짓는 중요한 기본 바탕이 되어 온 것이다.


비록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치적을 위해 구 중앙박물관을 부수고, 독도문제에 불같이 화를 내는 등 일제와의 고리를 끊는 척 과시하지만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실제 우리 사회는 일제시대 때 시작되었던 근대화의 연장선에 서 있으며 아직까지도 그 공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컨대 아직까지 우리사회를 조직하는 주요 논리인 군사주의 역시 일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2006년 한해 학계를 뜨겁게 달궜던 소위 '해방전후사' 논쟁도 결국은 이와 같은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관점 차이다. '식민지 수탈'이라는 근대화의 목적을 감정적으로 중요시하는 이들과 그 목적과는 상관없이 근대화의 결과만을 살피고자 하는 이들의 끝없는 논쟁.


그것은 결국 일제의 근대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가 지고 있는 모순이며, 대안으로서 다른 체제를 상상하지 못하는 경직된 사회가 갖는 한계다. 거론조차 되지 않는 홍예문의 현실과 나와 다른 대안은 모두 불순한 사상으로 몰아가는 양극단의 사회. 아직 우리는 내면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근대의 기념비와 전쟁

홍예문을 지나 자유공원 가는 길. 동인천에서 올라올 때와 달리 길 옆에는 점집 대신 카페들이 들어서 있었다. 아무리 센 맥아더 장군이라 할지라도 결국 자본 앞에서는 무력한 것일까? 덕분에 자유공원은 도심의 휴식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증명하고 있었다.

노을 해가 나무에 걸릴 때 쯤 들어선 자유공원. 처음부터 눈에 띄는 건 역시나 커다란 조형물들이었다. 시대의 기념비. 그 첫 장식은 인천학도의용대에 대한 동상과 탑이었다.

전쟁은 근대의 주요 기념 대상이다. 근대국민국가는 결국 전쟁을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모든 백성들에게 평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대신 전쟁에 참여할 의무를 강제함으로써 국민을 만들어내었고, 국민은 전쟁을 경험하며 타자와 다른 '우리'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역에 따라 '시민'으로, '민족'으로 '국민'으로 다르게 명명되었지만, 인종, 종교, 계급 등 그 어느 원심력보다도 강한 정체성과 구속력을 띠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주적' 북한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북한이 현실적으로 우리의 위협인가와는 상관없이, 전쟁 속 타자였던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현실적인 위협이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다.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반공, 반북으로 규정해 온 이들이 햇볕정책에 그토록 반대하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정체성 때문인 것이다.

근대국민국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전쟁. 따라서 근대체제의 군대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군대는 전쟁의 주체로서 단순히 국가안보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지키기 때문이다. 각각의 충성스러운 군인은 국민국가에 속해있는 국민의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되며, 군대 그 자체는 국민의 재사회화 기능을 떠맡는다.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들이 자위대를 현실화 시키면서 '보통국가'를 부르짖는 것은 결국 군대 없는 근대국민국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맥아더 장군 동상과 기억의 재구성

맥아더 장군 동상 근처의 초소. 무엇을 지키기 위함일까요?
맥아더 장군 동상 근처의 초소. 무엇을 지키기 위함일까요?이희동
이만 상념을 접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긴다. 미끄러운 눈길에 땅만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어느새 시야가 환해져 있었다. 인천자유공원의 정상. 그리고 그곳에 늠름한 모습으로 맥아더 장군이 서 있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만으로도, 그 멋들어진 모자와 선글라스만으로도 아직까지 우리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맥아더. 때로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때로는 흉포한 전쟁광으로 그려지는 맥아더의 동상을 보고 있자니 온갖 잡념이 떠올랐다. 매카서를 맥아더로 부르는 이유부터 시작해서, 전후처리에 있어서 맥아더가 일본 천황과 관련하여 행했던 일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등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앞서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반가움이었다. 20여년 만에 찾은 자유공원과 맥아더 동상. 그리고 어린 시절 그 앞에서 친구들과 뛰놀던 즐거운 기억. 맥아더 동상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내게 고마운 존재였다. 지금의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는 별개로, 그곳은 나의 추억이 서린 장소로서 개인적으로 애틋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우리 역사 속 맥아더의 의미와 이곳 자유공원에 서 있는 맥아더 동상의 문제점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맥아더 동상에 대한 나의 감정을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적 역사가 결코 개인적 경험의 합이 아닌 이상, 공적 역사가 모든 사적 경험을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며 때로는 가장 폭압적이다. 그것이 진보적이건 보수적이건 간에 과거에 대한 공적인 해석은 독재와 전제의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게 마련이며 이것이 강요될수록 그 사회는 경직될 수밖에 없다. 반공국가인 우리사회에서의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적인 해석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전쟁에 대해 개인적으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아 왔던가.

따라서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해석의 독점을 막기 위해서 사회는 개인들의 미시적인 기억들을 존중해야 한다. 각 개인의 경험에 근거한 역사인식은 그대로 인정되어야 하며, 그 인식들을 모아 더 풍부한 역사를 만들고, 그 속에서 공론을 모아 현실의 치유책을 찾아야 한다. 현재 국가 정체성의 문제가 되어버린 맥아더 동상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그 시대를 살아냈던, 생략되어버린 개인들의 기억을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만국, 미국

맹목적으로 동상 주위를 돌고 있는 경찰.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맹목적으로 동상 주위를 돌고 있는 경찰.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이희동
눈으로 덮인 맥아더 동상. 얼어붙은 그 주변을 경찰 한 명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찾아오는 이 하나 없었건만 그 경찰은 무엇 때문인지 동상 주위를 계속 돌고 있었다. 설마 저번에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두고 진보-보수 단체끼리 충돌했었기 때문일까?

설마 했건만 역시였다. 경찰한테 물어본 즉, 자신의 임무는 동상 주위를 30분씩 교대로 2시간 동안 도는 것이란다. 동상 옆으로는 2개의 초소가 있었고 그곳에는 만약을 대비한 방패, 곤봉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광화문의 미국 대사관.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있든 말든 하루 종일 맥아더 동상 주위를 뱅글뱅글 돌아야 하는 우리의 경찰. 그 맹목적인 움직임은 결국 미국을 아직까지 성역으로 인식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미제'라면 껌뻑 죽고 '미제 석·박사 학위'는 있어야 배웠다는 소리를 들으며, 심지어 미국이 일으키는 전쟁은 그 정당성과 상관없이 '성전'을 떠올리는 사회. 그것은 '혈맹'으로서 미국이 우리를 도와줬기 때문도 아니요, 현재 미국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자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국가정체성을 미국이 담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일몰과 인천항.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일몰과 인천항.이희동
인천항이 보이는 석정루. 이쯤에서 우리 선인들은 근대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인천항이 보이는 석정루. 이쯤에서 우리 선인들은 근대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이희동
맥아더 동상을 뒤로 조금만 걷다 보니 인천항의 모든 바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왔다. 아름다운 서해의 노을. 해는 빨갛게 떨어지고 있었고 항구의 거대한 기계들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망대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 아마 100년 전 우리네 선인들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근대의 상징이었던 인천항을 넋 놓고 바라보면서 급변하는 시대를 절감하며 그 혼란 속에서의 먹고삶을 걱정했으리라.

연오정과 한미우의 기념비.
연오정과 한미우의 기념비.이희동
이윽고 해는 구름 속으로 사라졌고 난 더 추워지기 전에 발걸음을 옮겼다. 맥아더 장군 동상에 가려져 각광받지 못하는, 자유공원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상징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자유공원은 맥아더 동상 말고는 어떤 기념비들을 품고 이 시대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을까?

그러나 내 기대는 곧 무너지고 말았다.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장군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미국과 관련된 기념비들뿐이었다.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비롯해서 한미우의 기념비, 한미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연오정 등등. 과거 만국공원이라 불렸음이 무색할 정도로 현재의 자유공원은 미국 일색이었다. 자유공원은 현재 대한민국의 만국이 미국임을, 우리가 미국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현실에 대한 씁쓸한 인식을 안고 집에 가는 길. 올라왔던 방향과는 반대로 발걸음을 옮기니 그곳에는 낯선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외국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바로 그 패루였다. 중국인 화교들이 살고 있다는 바로 그 징표. 그곳에서부터는 딴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희동

덧붙이는 글 |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인천 차이나타운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인천 차이나타운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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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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