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궁했던 화교들의 삶.이희동
이런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근대적 의미로서 '우리'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결국 소수자라 함은 보편적으로 규정된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의 개념이며, 그것은 푸코가 언급했던 근대적 의미의 정상-비정상 규정짓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인식에는 우리 사회의 역사가 고스란히 반영될 수밖에 없다. '우리'라는 개념은 결국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의미로서 '우리'의 탄생은 결코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비록 우리는 '단일민족'의 신화를 배우며 우리 민족의 고유함을 운운하지만 과거 고구려, 백제, 신라는 언어조차 쉽게 통하지 않는 관계였으며,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사람들 정체성의 주요 근간은 민족이나 국가가 아닌 문중이요, 지역사회였다.
외부의 적이 존재하면 내부는 통합된다는 만고의 진리대로, 지금과 같이 국가나 민족을 전제로 한 '우리'는 외세 열강의 침략에서부터 시작해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비로소 형성된 개념이다. 밖으로부터 시작된 근대의 충격으로 인해 우리는 시대적 대세로 어쩔 수 없이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으며, 근대화의 최소 인자인 '우리', 즉 민족, 국민 개념으로 공동체를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역사적 배경은 새로 구성된 '우리'에게 중요한 특성을 부여하였다. '우리'는 외부침략에 대응한 자기방어의 기제인 만큼 그 구속력이 매우 강했으며, 그만큼 '우리' 밖 타자에 대한 배려의 여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그 어느 사회부터 강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만큼 소수자에 대한 편견 역시 심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단일민족'의 신화를 강조하는 만큼 '살색'에 대한 편견은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이와 같은 정상과 비정상의 구별 및 차별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가 안정되고 개인화 되면서 사람들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게 되었고 '우리'에서 제외된 소수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극우파의 재등장이라는 유럽의 고약한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비록 경제 등이 나빠져 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면 또다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심해질 가능성이 있지만, 어쨌든 현재 우리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인식은 차차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소수자에 대한 인식 변화가 같을 수만은 없다. 장애우에 대한 눈길과 동성애자에 대한 눈길이 다르듯이, 소수자에 따라 그 인식의 변화도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결국 소수자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사회문화적인 개념인 이상, 각자 다른 사회적 위치를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자가 자유공원을 지나 차이나타운을 들어서면서 떠올렸던 화교는 아마도 그 소수자 중 인식변화가 매우 개선된 경우일 것이다.
소수자로서의 화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