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으면 바다 한가운데서 멀리 가물거리는 섬들사이로 지는 낙조를 감상할수도 있다정윤섭
남해의 진섬 보길도를 찾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가장 먼저 '윤선도 유적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고산이 이곳 보길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시대에 서남해의 섬들이 유배지로 이용되었으니 이러한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고산에게 있어서 보길도는 세상(속세)을 멀리하고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경영한 공간이다.
어떤 사람은 고산이 보길도에 자신만의 유희적 생활공간을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그 속에는 풍수사상(자연사상)과 성리학(유학자)적 생활을 추구한 사대부 고산의 생활철학이 들어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고산이 경영한 자연을 원림(園林)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다.
@BRI@그의 문학과 음악을 아우르는 예술적 기질로 인해 때론 고산의 생활이 음풍농월적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황과 양반문화를 생각해 본다면 그 생산적 가치를 재평가해 볼 필요도 있다.
보길도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보길도 부용동의 여기저기에 고산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 보길도에선 고산의 유거지가 복원되어 가고 있고 그가 명명한 지명들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보길도의 모습을 보다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보길도지(甫吉島識)>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보길도지>는 고산의 5대손인 윤위(尹위)가 고산문학의 산실인 보길도를 찾아 그곳의 조경과 풍경을 소상하게 밝힌 기행문이다. 고산의 5대손인 윤위(1725~1756)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년 전 보길도를 답사하고 고산 유적의 배치와 구조, 그때까지 전해 내려오던 고산의 생활상을 낱낱이 기록하였는데, 고산이 손수 지었다는 낙서재(樂書齋)를 비롯해 고산과 얽힌 일화 등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보길도는 고산이 죽고 난 후 고산의 서손인 학관(學官)이 살면서 연못을 낙서재의 난간 아래 좌우에 옮겨 파고 화계(花階)를 쌓아 온갖 꽃을 줄지어 심고 기암괴석으로 꾸미기도 하였다. 또 학관의 아들 이관(爾寬)이 오량각(五梁閣)을 사치스럽게 지었다는 이야기도 나와 고산 이후 주변이 본래보다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때까지는 부용동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