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얼룩들에게 끝없는 풍구질

[서평] 최정례 시집 <붉은 밭>

등록 2006.12.28 15:37수정 2006.12.2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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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최정례 시집 <붉은 밭>

최정례 시집 <붉은 밭> ⓒ 창작과비평사

최정례 시인은 내가 작품을 처음 본 후 쉽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없었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마도 4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당시는 허기진 사람처럼 시를 찾아 읽던 때였는데, 내가 받아보고 있던 대여섯 권의 문학지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지역에 있는 포항공대 도서관 잡지실에 자주 들랑날랑했다.

아마도 어느 월간지로 기억되는데 거기서 최정례 시인을 처음 만났다. 서너 번 그의 시를 읽었는데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 이런 시가 다 있나? 라고 생각하면서 오기로 무더운 여름 날씨에 낑낑대며 몇 번이나 더 읽고 나서야 어렴풋이 시의 내용을 붙잡았던 기억이 난다.


순수 독자의 입장으로 보면 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지 않을까. 시를 읽으면 그 내용이 솜에 물 스며들듯 독자에게 곧장 다가오는 시와 몇 번을 읽어도 시의 문맥이 잘 잡히지 않는, 독자를 자꾸만 밖으로 밀어내는 시. 최정례씨는 단연코 후자에 속하리라.

그의 작품과 처음 만난 후 두 번째 시집 <햇빛 속에 호랑이>를 읽고, 첫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그리고 지난 가을에 나온 세 번째 시집 <붉은 밭>을 차례로 읽고 난 후의 내 독후감이 그러하다.

그의 시를 읽을 때 "내가 어느 편에 서든 그 나무는 늘 뒤편을 만들고 나는 다시 뒤편으로 가고 그 짐승은 뒤편의 뒤편으로 간"('그 나무 뒤' 부분), "뜻도 모르고 책장을 넘기는 아이처럼 복숭나무 그 난해하나 아름다운 한 그루 책 앞에 머뭇거립니다"('꽃핀 복숭나무에게' 부분)라는 상황에 종종 빠져들곤 했다.

@BRI@최정례의 시가 독자에게 어렵게 읽혀지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 편의 시에 의미와 시간의 중첩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시적 구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상의 전개에서 하나의 의미가 연속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그것이 중도에 끊어지고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질 때 독자는 당황한다. 거기다가 시간의 복합 현상까지 끼어들면 시의 의미 해독은 더욱 난감해진다.

최정례 시에 자주 나타나는 시적 화자의 최대한도의 감정통제, 완성된 시적 진술을 중도에 끊어버리고 독자의 상상력으로 그걸 이어가게 하는 과도한 생략적인 시적 진술-미완결형 구문은 독자를 자꾸 밖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주의 깊게 다시 한 번 더 화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독자에게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러한 독자들에게 최정례의 시는 독자의 시선을 서서히 그리고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마력을 품고 있다. 새로 읽을 때마다 시의 내용은 풍요롭고 깊이 독자의 몸속에 새겨진다.

최정례의 시적 상상력의 진원지는 지나간 시간 속에 묻어있는 삶의 얼룩들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경험했던 가난과 언니의 죽음, 렉드옥스란 술집에서 울고 있었고 연탄가스 먹고 실려갔던 스무 살 적의 삶들처럼 상처로 몸에 박혀 든 절망의 슬픈 기억들이다. 시인은 그 갇혀 응고되어 있는 과거의 시간을 오늘의 여기에 힘겹게 끌고 나와 시의 몸을 만들어낸다.


시집 <붉은 밭>이 뿜어내는 빛깔은 대체로 화창하지 못한 칙칙한 잿빛이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붉은 밭의 황토 빛이다. 죽은 자가 시의 화자가 되어 음울하게 읊조리거나('흘러가다'), 시간의 착란 현상으로 방이 넷인 아파트에 두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는 내가 고3 이홍주가 되어 아궁이에 탄불이 꺼진 찬 방바닥에 어린 동생이 죽어 누워 있는 곁에서 흐느껴 울고('붉은 구슬') 있는 것처럼 지난 삶의 결핍된 얼룩들이 지배적이다.

기억 속의 시간, 거기에 묻어 있는 결핍된 삶의 얼룩은 통일되고 일관된 것이 아니고 부서지고 조각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형으로 아직도 내 몸속에 진행 중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어법이 불분명하거나 혼란스럽기도 하다. 조금은 힘겨울 테지만 인내심을 갖고 그가 풀어내는 어법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우리는 행복한 만남을 가질 수 있다.

희부염한 아픈 기억의 창고에다 끝없이 풍구질을 하면서 그려내는 시인의 지난 삶의 얼룩들을 우리가 만지고 젖어드는 사이에 우리의 삶의 폭이 다채롭게 확장되는 놀라운 경험을 갖게 된다.

그의 시를 통해서 독자는 삶의 지평이 확장되는 고귀한 선물을 건네받는다. 최정례가 언어로 그려내는 그 파편화된 아픈 상처의 기억들이 독자의 경험과 다시 만나 새롭게 창조되어 세상의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남는다. 살아난다.

깜빡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푸른 골짜기 사이 붉은 밭 보았습니다 고랑 따라 부드럽게 구불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풀 한포기 없었습니다 그러곤 사라졌습니다 잠깐이었습니다 거길 지날 때마다 유심히 살폈는데 그 밭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엄마가 내 교과서를 아궁이에 쳐넣었습니다 학교 같은 건 다녀 뭐하느냐고 했습니다 나는 아궁이를 뒤져 가장자리가 검게 구불거리는 책을 싸들고 한학기 동안 학교에 다녔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타다 만 책가방 그후 어찌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밭 왜 풀 한포기 내밀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그러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끔 한밤중에 깨어보면 내가 붉은 밭에 누워 있기도 했습니다

- '붉은 밭' 전문
.

위 시에서 '붉은 밭'은 "풀 한 포기 내밀지 않기로 작정"한 기억 속에 있는 상처의 굳은 딱지로 남은 황무지다. "육체는 감옥이라서"('비행기 떴다 비행기 사라졌다') 그 붉은 밭은 내 몸에 구불거리며 계속 살아있다. 이런 황폐화된 마음속의 붉은 밭이 시인으로 하여금 끝없이 언어를 만지게 한다.

몸에 상처의 기억을 많이 새겨져 있는 시인은 행복하다. 최정례의 시는 의식 혹은 무의식이 밀어내고 있는 지난 삶의 얼룩들을 무질서하게 흩어놓고만 있는 책임 없는 난해시는 결코 아니다. 시의 모티프는 기억 속의 파편화된 삶에서 가져오지만 시인은 그것을 시라는 형식에 안착시킬 때는 고도의 시적 전략 속에서 진행시킨다.

최정례의 시를 거듭해서 읽어보면 산문시에서도 시의 율격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고도의 계산된 어법으로 얻어내는 시의 리듬, 그리고 냉정하리만큼 감정을 절제한 구문들 모두 그의 시를 훌륭하게 떠받치고 있는 시적 장치들이다. 시 속에서 예민하게 쓰이고 있는 조사와 어미 사용도 마찬가지다.

누구든 시간의 지남에 어찌할 수 없고 그 시간이 남긴 흔적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최정례의 시를 읽으면서 '삶은 거대한 시간의 이삿짐이다'(윤제림)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다. 현재의 나는 지난 시간으로부터 유배되어 살고 있는 몸인지도 모른다.

다시 "육체는 감옥이다" 최정례는 과거 기억 속의 결핍과 얼룩에 포박되어 있다. 시인은 "그 결핍의 얼룩을 통해 다른 이의 얼룩을 안고 덧없는 순간으로부터 벗어나 세계와 닿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시인은 자신의 그 결핍과 얼룩의 상처를 다시 언어로 매만지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끌어안고 세계와 다시 만나고자 한다. 자신의 새 길을 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최정례의 시가 최근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나무다. 현대 물질문명으로 야기된 반생명적 현상의 절망적 징후를 그려내고 있는 '악몽의 벚나무'도 주목을 요하는 작품이지만, 나는 '미루나무'라는 시에 오래 눈이 머물렀다.

미루나무는 미루나무와 잔다
미루나무는 미루나무와 이야기한다
기나긴 진창의 시간을
(중략)
미루나무 미루나무에 얽매여
미루나무를 거절하고
미루나무로 붙들리고
미루나무 시간을 삼키고
구름을 뱉는다

미루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흩어지고 부서지며 떠간다

- '미루나무의 길'


나는 위 시를 몇 번이나 읽으면서 시어 '미루나무'를 '최정례'로 자꾸만 바꿔 읽는다. '최정례는 최정례와 잔다 최정례는 최정례와 이야기한다 기나긴 진창의 시간을'.

시인이라는 천형의 길, 자신의 길을 노래하고 있는 듯한 이 시에 내 눈은 오래 머문다. 짧은 지면관계로 페미니즘 시각으로 그의 바라보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덧붙이는 글 |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송고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송고할 것입니다.

붉은 밭

최정례 지음,
창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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