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보신각 종소리를 날마다 들었다

등록 2007.01.01 10:47수정 2007.01.0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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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날, 사람들은 제야의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며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 종이 울리는 그 시각 직전에 종로2가 보신각 주변으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고 행사는 시작된다. 지하철도 연장 운행한다고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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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종루. 보신각으로 불린다. 현판도 보신각이다. 재야종소리 행사준비가 한창이다. ⓒ 신병철

언제부터 이런 '제야의 종소리'가 유행하게 되었을까? 사실 보신각 종소리는 일 년에 몇 번 중요한 날에 친 종이 아니었다. 매일 하루에 평균 두 번 이상씩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세력은 도성을 쌓고 그 안에 궁궐, 사직, 종묘, 관청 등 중요한 건물들을 세웠다. 이런 중요한 곳에 아무나 함부로 들락거려서는 안될 일,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문을 만들고 통행을 통제했다. 야간통행금지제도도 실시했다. 이런 것을 알리기 위해 큰 종을 서울 한복판에 만들어 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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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루부근 과거 지도와 현재 안내도, 대광통교로 넘어가는 길과 종로가 만나는 곳에 종루가 있다. ⓒ 신병철

서울의 한복판은 흥인지문(동대문)과 돈의문(서대문)을 연결하는 대로와 그것을 직각으로 숭례문(남대문)을 향하는 길이 만나는 곳이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 보신각이 있는 곳 부근이었다. 그곳에 종을 거는 건물 종루를 짓고 종을 걸었다. 종루는 그야말로 서울의 가장 한가운데, 서울 도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또한 국가에서 인정한 시장인 시전을 여는 곳이기도 했다. 이 시전 가게가 있는 곳을 운종가라 했는데, 종루의 종소리는 운종가에 모인 사람들과 서울 사람들 모두에게 통행금지시각, 해제시각, 화재경보 등을 알리는 비상사이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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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전 표지석과 현재 종로2가, 종로에는 국가지정상점인 시전이 있었다. 육의전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가게다. ⓒ 신병철

원래 보신각종은 속칭 인경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울 한복판에 종을 내달고 소리를 낸 것은 권근이 쓴 '종루종명서문'(鐘樓鐘銘序文)에 잘 나와 있다. 새왕조 개창을 후세에 전함, 아름다운 종소리로 사람들의 이목을 깨우침, 일하고 쉬는 시간을 엄히 함, 이 세가지가 그 목적이라고 했다. 여기에 화재나 비상시에도 종을 쳐 그것에 대비하도록 했다.

상오에는 오경삼점, 지금의 시각으로 새벽 4시쯤에 33번을 쳤는데, 이를 파루(罷漏)라고 불렀다. 33번은 우리나라에서는 길수 중에 길수에 해당하는 숫자다. 불교의 33천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천인들처럼 보람찬 하루가 되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오에는 일경삼전, 지금 시각으로 오후 7시쯤에 28번을 쳤는데, 이를 인정(人定) 이라 불렀다. 별자리 28宿에서 나왔다고 하나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인경이란 말은 인정이 와전되어서 나온 말이라 여긴다.

종루는 태조 때인 1396년에 처음 지었다. 큰 종도 이때 만들었으나, 시험타종 때 깨지고 말았으나, 왕명을 받은 권중화가 백금 50냥을 혼합하여 완성했다고 한다. 이 종은 임진왜란 때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태조 때 지은 종루가 격에 맞지 않았는지, 세종 때인 1440년에 크게 다시 지었다. 동서로 5간, 남북으로 4간이나 되는 20간의 2층 누각(다락집)이었다고 한다. 대로 한가운데 종루를 짓고 2층에는 종을 매달고, 그 아래는 십자로 사람과 마차가 다닐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이곳 이름이 종루십자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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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시도 1830년작에서 보이는 서울과 종로, 중간 좌우의 빨간 줄이 종로이고 아래로 굵은 빨간 줄이 대광통교가는 길이다. 그 십자로에 종루가 있었다. ⓒ 서울역사박물관도록

서울 한복판 가장 번화한 곳에 종루가 높이 솟아 있고, 그 아래로 사람들이 복잡하게 들락거리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자. 1488년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사신인 동월이라는 사람은 '종을 매단 누각이 성안 네거리에 있는데, 높고 크다 함은 바로 이것이니라'라고 종루의 모습을 그렸다. 지금과는 정반대로 당시의 종루는 주변에서 가장 높고 큼직하며 장중한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 종루는 임진왜란으로 종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고 말았다. 서울을 수복한 선조임금은 가장 시급한 것이 종을 매다는 일이었나 보다. 남대문 옆 풀섶에 버려져 있던 종을 찾아 주변 언덕에 매달고 사용했으나 변변치 못했던 것 같다. 1594년 이후에는 이전의 종이 아닌 새로운 종이 사용되었다.

전쟁폐허를 거의 수복한 광해군은 새로운 종을 매다는 집을 지었다. 이때 지은 집은 전쟁전과는 달리 단층이었다. 그래서 종루가 아닌 종각이 되었다. 이때 매단 종도 임란 전의 종이 아닌 새로운 종이었다고 한다.

이 새로운 종이 우리가 말하는 보물2호인 보신각종이다. 이 종에 새겨진 '성화(成化) 4년'이라는 명문으로 1469년 세조 때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높이가 3m가 넘고 아래 부분 입지름이 2m가 넘는다. 무게는 20톤 가까이 되는 엄청나게 큰 종이다. 경주의 성덕대왕신종과 크기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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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종, 보물2호, 지금은 국립박물관에 있다.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이종은 성덕대왕신종과는 많이 다르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 고유의 양식에 중국 범종 양식이 결합된 한중혼합형이다. 얼마 전 타버린 낙산사동종과 시기도 양식도 비슷하다. 우리 고유의 음통이 없고, 여성들 젖꼭지 모양도 종 어깨 부분에 없다. 몸체와 아래쪽에 3선 2선의 띠모양 장식이 있다. 조선전기의 우리 동종의 전형적인 모습에 해당한다.

@BRI@세조 때 만든 이 종이 임진왜란까지 어디에 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종각에 걸리게 되었을까? 이 종은 처음에 돈의문(서대문) 안의 신덕왕후 정릉의 능사에 있었으나, 이후 원각사로 옮겨져 잔존했던 것이란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비, 강비로 두 아들 방번과 방석을 낳았으나, 두 왕자 모두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조가 왜 강비를 위하여 동종을 만들었을까? 세조는 병치례가 잦았다고 했다. 특히 피부병이 많아 부처님께 소원을 많이 빌었다. 세조는 아마도 할아버지 이방원 태종에게 원한을 품고 죽은 신덕왕후의 원한을 풀어 피부병을 낫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번 알아볼 일이다.

광해군 때 만든 종각은 이후 운종가에서 1685년과 1869년 2차례 큰 불이 나면서 함께 불탔다고 한다. 다행히 종은 조금 파손당했으나 형태는 그대로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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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 옛날 모습, 지금은 2층 누각이었으나 1970년대 이전에는 단층이었다. 저런 모습일때 이름은 종각이어야 한다. ⓒ 옛날사진 도록

1895년 고종 32년에 이제까지 유지해 왔던 종각을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보신각'(普信閣)으로 바꾸었다. 이후 종이름도 속칭 보신각종이 되어버렸다. 세조 때 만든 종이 1594년에야 종각에 걸리게 되었고, 이후 400년 동안 울렸던 종이 갑자기 보신각종이 되어 버린 것이다.

1909년 국운이 다함과 함께 종소리도 멎었다. 일제시기 종각은 도시정비과정에서 약간 동남쪽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보신각종소리 한번 시원스럽게 듣는 것이 소원이었던가 보다. 해방의 날 서울사람들은 보신각으로 달려들어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종을 두드렸다고 한다.

심훈 시인은 1931년에 쓴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에서 미리 해방 때 인경종소리 치면서 기뻐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며,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바당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이까


보신각은 한국전쟁 때 무사하지 못했다. 1.4후퇴 당시 포탄을 맞아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인경종 역시 무사하지 못하고 땅속에 처박혀 버렸다. 전쟁 직후인 1953년 12월에 급히 종각을 다시 세웠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현판 "普信閣"을 써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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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 현판, 1953년 건립할 때 이승만대통령이 썼던 것을 확대하여 현재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 신병철

1979년에 지금의 보신각을 지었다. 장소는 조금 다르지만 세종시기의 규모인 20간 2층 누각을 세운 것이다.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을 확대해서 붙였다. 그래서 형태는 누각이지만 이름은 단층인 보신각이 되어 버렸다. 당연히 단층이 아니므로 '종루'로 되어야 할 것이다.

너무나 많은 수난을 당해온 보신각종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나 보다. 1985년에 새로 만든 종을 보신각에 매달고, 15세기에 만든 종은 박물관으로 안치되고 말았다. 그래서 종루이면서도 종루로 불리지 못하는 곳에서 인경의 기능을 상실한 상처투성이 원각사종은 유물이 되어 박물관으로 가버렸다.

그래도 한 때는 무서운 종이기도 했단다. 인정종부터 파루종까지는 통행금지 시간이었고, 그것을 어기면 직결 처분으로 맨살 곤장을 맞았다고 한다. 초경에 범한 사람은 10대, 2경범은 20대, 3경범은 30대, 4경범은 스물다섯 대, 5경범은 10대씩이나 체벌당했다니 무시무시한 소리기도 했다. 단 여성은 옷을 벗기지 않고 옷 위로 때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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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장치는 예날 목습, 통행금지시간을 위반하면 저렇게 곤장을 맞았다. ⓒ 옛날 사진 도록

지금의 보신각 규모가 된 데는 지하철 공사가 한 몫을 했다. 공사하느라 땅을 파다가 세종시대 종루 초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당시 규모로 한다고 당시 서울 모습을 찾아내기란 너무나 어렵다. 옛날 모습인지 알 길도 없다.

게다가 이미 종로에서 광통교로 넘어가는 네거리 한가운데 높고 큼직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존재했을 종루는 이미 아니다. 길에서 약간 벗어난 곳 외진 곳에 덩치는 옛날 덩치인지 몰라도 지금은 주변 건물에 비해 너무나 왜소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눈을 감고 가만히 당시를 상상해 볼 수밖에 없다.

지금 보신각종은 일년에 몇 번밖에 울리지 않는다. 어차피 종루도 아니고 보물도 아닌 새 종일 바에야 현재에 맞게 한번 활용함이 어떨까 싶다. 지금도 종로는 엄청 붐빈다. 청소년 귀가 시간인 10시쯤에 28번, 아침 출근시간 시작인 6시쯤에 33번 쯤 울리면 안될까? 도시 한가운데서 뎅뎅 울리는 종소리도 들음직할텐데…. 저렇게 제야에만 행사로 울려대는 것도 볼만하지만 말이다.

제야의 종소리 들으면서 무슨 소원 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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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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