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05회

등록 2007.01.03 08:59수정 2007.01.03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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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철한은 작정을 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자꾸 피하려 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제는 자신들도 다급해졌다. 뭔가 방도를 궁리해야 한다.

"네 녀석들 솜씨는 확실히 뛰어나더군. 내가 겁날 정도로 말이야."


혈간의 시신에 난 상처를 보고 한 말이다. 풍철한이 작정한 듯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냥 빠져나갈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하게 내비치고 있다. 설중행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였다. 그 모습을 바라 본 능효봉이 피식 헛바람을 불어냈다.

"무섭구려…."

어쩔 수 없었다. 설중행은 이런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더 이상 숨길 것 없이 모두 말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사실 그가 알고 있는 것도, 말해줄 것도 그리 많지도 않을 터이지만 풍철한과 함곡은 그것을 토대로 자신을 매우 귀찮게 할 것임이 분명했다. 어차피 풍철한과 함곡에게는 한꺼번에 모두는 아니더라도 조금씩은 던져주어야 했다. 다만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는 법이다. 아직 시기가 아니고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저녁에 우리와 술 한 잔 하자고 하지 않았소?"

뭔가 대답이 나올 것이라 잔뜩 기대를 걸고 있던 풍철한은 능효봉의 말에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말인즉 그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뜻이다. 풍철한은 망설였다. 하지만 이미 그런 대답이 나온 이상 지금 당장 더 이상 강요하기는 어려웠다.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는 말은 이런 순간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던진 말이었다.


성격이 급한 풍철한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강요로 시작될 저녁의 술자리가 이제는 강요가 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에 위안을 삼아야 할까? 분명 능효봉이 저렇게 말을 뱉은 이상 저녁에는 마지못해 털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로 하세."


함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아무리 다그쳐도 능효봉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했다. 백호각에서 다른 이들은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함곡과 풍철한은 가끔씩 표출되는 설중행의 암울한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 알 수 있었다.

백호각 양쪽에 푸줏간의 고기처럼 널려있는 동료들을 보며 그 자리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것만도 설중행과 능효봉의 인내심이 얼마나 깊은지 인정해야 했다. 풍철한 역시 한 발 물러서는 것이 좋으리란 생각이었다.

"좋으이… 오늘 저녁에는 잔뜩 취해보기로 하자구…."

함곡은 풍철한이 순순히 물러서주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지 않으니 두 분도 지금부터 일을 도와주시면 좋겠소."

"사실 뭐 도와드린 것도 없지만 피곤해 좀 쉬고 싶었는데… 무슨 일을 도와드리면…?"

설중행은 정말 피곤해 보였다. 아마 동료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몰랐다. 확실히 전혀 내색하지 않는 능효봉에 비해 경험과 감정조절에 있어 아직 미숙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오. 좌총관께서 말씀하셨던 서향을 사용한다는 사람들을 만나 조사해 주시면 어떻겠소? 물론 그 중 보주의 제자인 추교학은 본인이 만날 것이니 제외하고 궁수유 소저나 보주 따님인 우슬 소저에 대한 조사는 두 분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소."

뜻밖의 제안이었다. 두 사람에게 조사를 시킨다는 것은 이미 자신과 같은 일행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권한을 주는 행동이었다. 확실히 이 점에서는 함곡이 풍철한 보다 한 수 위였다. 이쪽에서 확실하게 같은 운명의 동료로 대접하면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모든 것을 털어놔야 할 것이었다.

함곡의 급작스런 제안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설중행이 능효봉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는 눈빛이었는데 능효봉 역시 당혹스러운지 잠시 말이 없었다.

"밥값은 해야지."

풍철한이 거들자 잠시 망설이던 설중행이 대답했다.

"그래 보지요."

능효봉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했고, 또한 풍철한과 함곡의 도움도 절실했다.

"더 하실 말씀이 계시오?"

능효봉이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없어. 두 사람만으로 어려울 것 같으면 반효가 동행하는 게 어때?"

"괜찮소. 찬모나 시비 정도야… 기껏 보주의 셋째제자인 궁수유가 문제지만 아니라도 잡아떼면 돌아올 수밖에 더 있겠소?"

"궁수유 소저나 우슬 소저의 조사에 내 누이동생이라도 필요하면 동행시키겠소."

함곡이 말하자 능효봉이 손을 홰홰 내저었다.

"선화소저라면 우리보다 훨씬 조사를 잘하겠지만 어차피 우리에게 맡긴 일 아니오? 일을 맡긴 이상 내버려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오. 우리 조사가 시원치 않으면 다시 동행해 가보면 될 것 아니오?"

"하하… 두 분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것이나 받으시오."

함곡이 계면쩍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봉비를 능효봉에게 건넸다. 그 행동은 너무나 돌발적이어서 능효봉은 함곡이 내민 봉비를 받지 못하고 함곡과 풍철한을 쳐다보았다.

"우리들은 이미 알려져 있으니 반드시 그 물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오. 하지만 두 분은 문전박대 당하지 않으려면 그것이라도 가져가야 할 거요."

그 말에 풍철한 역시 설중행에게 용비를 던져주었다. 설중행이 받지 않으면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아 마지못해 받자 능효봉 역시 함곡에게서 봉비를 받았다. 확실히 함곡은 배려가 깊고 일을 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능효봉은 씨익 웃었다.

"우리가 비록 보잘것없는 놈들이지만 그런 쪽은 꽤 하오. 저녁에 봅시다."

능효봉이 봉비를 오른손에 들고 왼손바닥에 탁탁 치면서 방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설중행 역시 잠시 눈인사를 보내더니 능효봉을 따라 나섰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함곡이 고개를 끄떡였다.

"두 사람 만의 시간을 주는 것도 괜찮겠지? 어차피 우리나 저들이나 이제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세는 마찬가지이니까…."

두 사람에게 일을 맡긴 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어차피 저 두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신들에게도 귀찮은 일들이 닥칠 것이다. 그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시킨 것은 아니었다.

"시간을 주면 저 놈들 성급하게 일을 벌이지는 않을까?"

풍철한이 우려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들이 아니야… 죽음을 친구로 삼아 지내온 사람들이잖나?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알고 있겠지만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을 거야."

함곡이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자 풍철한이 이상한 듯 물었다.

"나야 본래 충동적이지만 자네는 무슨 이유로 저들을 받아들이려 생각했나?"

함곡이 가지런한 치아를 내보이며 웃었다.

"자네와 마찬가지지… 그리고 이제야 알게 되었네."

"무엇을…?"

"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결하려면… 아니 우리가 무사히 살아나가려면 반드시 저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네."

아직 함곡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풍철한이 눈 꼬리를 치켜 올렸다.

"별 말을 다 하는군."

"나중에 두고 보게. 나는 오늘 상부호와 용추를 만나면서 갑자기 아주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네. 더구나 지금까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을 헤매다가 이제야 겨우 길을 가르쳐주는 빛줄기를 찾은 기분이라네. 바로 저들로 인하여 말이지. 지금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싫다 해도 반드시 동료가 되어달라고 오히려 사정해야 할 판이지."

점점 이해 못할 말이었다.

"도대체 나 모르는 무슨 일을 자네가 알고 있기에 뜬금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물론 지금부터 내 생각 전부를 이야기해 주고 자네와 상의해야 하는 일이네."

풍철한의 얼굴에서 의혹스런 표정이 짙어갈수록 함곡의 얼굴에는 미소가 짙어져 갔다. 그것은 오랜만에 방법을 찾았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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