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와 나> 겉표지.세종서적
<플란더즈의 개> <오수의 개> <하치 이야기> 그리고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마음이>의 공통점은 개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기특한 개가 등장한다.
개 이야기, 하면 대체로 모범적인 개가 등장하여 인간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 책 <말리와 나>에는 전작들에 나왔던, 그 훌륭하고 모범적인 개들하고는 거리가 먼 약간 정신 나간 개가 등장한다. 말썽만 일으키는 개가 주인공이 되는, 다소 색다른 개 이야기가 바로 미국에서 꽤 유명하다는 잡지의 칼럼리스트 존 그로건씨가 쓴 <말리와 나>다.
말리는 수의학적 용어로 '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 장애'라는 병명을 지닌, 한마디로 약간 미친개다.
물론 말리의 주인인 그로건씨는 말리의 상태에 대해 꿈에도 몰랐다. 그는 거금을 지불하고 명품 견으로 알려진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의 귀여운 강아지를 구해오면서 나름대로 포부도 가졌다. 래브라도 리트리버는 얌전하고 우직한 종자라서 애견대회에서 1등을 할 수도 있는 명품견이라고 생각하며, '그로건스 매저스틱 말리 오브 처칠(처칠거리 그로건 가문의 위대한 말리)'라는 좀 거창한 이름까지 지어놓은 채 말리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주인의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말리는 집에 온 첫 날부터 주인 말은 절대로 안 듣겠다고 작정한 개였다. 따로 재우려고 차고에 잠자리를 봐줬는데 하도 징징 거려서 주인은 하는 수 없이 침대 옆으로 데려와 등을 어루만지며 재웠다. 이미 시작부터 말리의 판정승이다.
천둥이 치던 어느 날 그로건 부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말리가 있던 차고는 마치 폭격을 맞은 듯했다. 아니, 폭격을 맞았다고 해도 그 보다는 덜 처참할 광경이었을 것이다. 바닥에 깔려있던 카펫은 갈기갈기 찢겨있고, 벽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후벼 파여 있었으며, 또 이곳저곳에는 말리가 흘린 피가 뿌려져 있었다. 차라리 차고를 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후로도 말리는 천둥이 쳤다하면 어김없이 집 안을 이런 꼴로 만들어버렸다. 천둥 알레르기가 있는 것이다.
천둥 치는 날만 그렇고 다른 날은 얌전한가? 물론 아니다. 다른 강아지의 일주일분 사료를 하루에 다 먹어치우면서도 뱃속에 거지가 들었는지 늘 뭔가 먹으려고 안달이다. 사료를 고박꼬박 주는데도 싱크대 위에 있는 샌드위치 훔쳐 먹는 건 기본이고, 아이가 먹던 음식까지 빼앗아 먹고, 그것도 모자라 장남감이고 펜이고 닥치는 대로 삼킨다. 심지어 안주인인 제니가 아끼는 값비싼 목걸이까지 삼켜서 그로건씨는 며칠동안 광부가 금을 캐는 심정으로 말리의 똥을 뒤적여야 했다.
그로건 가족은 가끔 외식을 하러 나가면서도 불안해했다. 말리가 또 어떤 사고를 쳤을지 몰라서 스테이크를 씹으면서도 노심초사해야 했다. 어떤 게 박살나 있을까, 불안해하며 현관문을 들어서면 어느 날은 오디오 스피커가 망가져 있고, 어느 날은 방충망이 뜯겨져 있다. 이처럼 말리가 그로건씨에게 입힌 재산상 손실은 돈으로 따지자면 요트 한 대 값은 된다고 주인은 주장했다.
말리는 훌륭한 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착한 개라는 말도 못 들었다. 밴시처럼 설치는 데다 황소처럼 기운이 셌다. 말리가 하도 요란스럽게 삶을 즐기는 바람에 녀석이 지나간 곳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같았다. 말리는 내가 아는 개 중 훈련소에서 쫓겨난 유일한 개다. 말리는 소파를 질겅질겅 씹었고, 방충망을 찢었으며, 쓰레기통을 엎는 데는 선수였다. 지능으로 말하자면 죽는 날까지 제 고리를 물려고 뱅뱅 도는 수준이었다. 마치 개의 역사에 새 장을 열려고 작심한 개 같았다.(377쪽)
그런데 이런 골칫덩어리 개를, 말썽만 피우는 개를 왜 키우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