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만큼 곡절 많은 우도와 등대지기 이야기

[박상건의 섬과 등대이야기 56]

등록 2007.01.05 15:56수정 2007.01.0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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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포 앞바다에서 바라본 우도 전경 ⓒ 박상건

천혜의 절경을 품은 아담한 섬

우도는 제주도 북제주군 우도면 소재지 섬이다. 성산포에서 북동쪽으로 3.8㎞ 해상에 떠 있다. 해안선 길이는 17㎞이고, 제일 높은 봉우리는 132m의 우도봉이다. 섬의 높이는 대부분 30m 이내일 정도로 구릉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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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포를 떠나 우도 앞 바다로 향하는 어선들 ⓒ 박상건

우도는 섬 모양새가 마치 드러누운 소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도 앞바다 중간 지점에서 섬을 바라보면 이러한 소의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BRI@섬 모양이 이런 데는 반도국가인 우리나라 지형의 특성 중 하나인 용암지대 때문이다. 해식애가 발달하고 한라산의 기생화산인 오름으로 형성된 섬이다. 아담하면서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우도는 성산포에서 배를 타고 가면서 그 진면목을 보여준다.

우도 선착장 오른쪽으로 하얀 백사장이 보이는데 서빈백사라고 부르는 산호모래톱이다. 이는 우도 8경 중 하나이다.

우도 8경이라 함은 제1경이 섬 남쪽 어귀의 수직절벽 광대코지이고, 제2경은 밤 고깃배의 풍경, 제3경은 포구에서 한라산을 바라본 풍경, 제4경은 우도봉에서 바라본 우도 전경, 제5경은 성산봉에서 본 우도의 모습, 제6경은 포구에서 바라본 광대코지, 제7경은 동쪽 해안의 고래굴, 제8경은 서쪽의 흰 모래톱인 바로 이 산호 백사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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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항 오른쪽으로 펼쳐진 산호 백사장과 펜션들 ⓒ 박상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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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선착장 우도항 ⓒ 박상건

이 우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97년 국가 소유의 목장이 설치하면서부터다. 이후 정착촌으로 자리 잡은 것은 1844년 김석린 진사 일행이 섬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우도는 본디 구좌읍 연평리에 속했으나 1986년 4월에 우도면으로 승격됐고, 현재(2006년 12월 기준) 4개 마을에 725세대 1718명이 거주하고 있다.

사연 많은 우도를 상징하는 100년 세월의 우도 등대

우도 정상인 우도봉에는 100년의 세월을 버텨낸 등대가 우뚝 서 있다. 잘 단장한 솔숲으로 182계단을 오르면 등대 사무소. 다시 20계단을 오르면 등대 사무실이 있다. 낮에는 푸른 언덕에 자리 잡은 하얀 등대로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이 작은 섬 우도에 굴곡 많은 해안선만큼이나 곡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서 있는 것이다.

우도등대는 우도의 상징이다. 등대가 최초로 불을 밝힌 것은 1906년의 일이다. 일본은 성산포 일대로 들어오는 물자를 급히 운반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거센 풍랑을 만났다. 지금도 우도와 성산 일출봉 사이 해협에는 거센 해류가 강물처럼 흘러간다. 특히 썰물 때 급류를 유관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 때문에 일본인은 우도 등대를 건립하도록 조선 정부에 명령했다. 그러나 목재와 등대를 건립하기 위해 물자를 운반하는데 매번 애를 먹었다. 파도가 너무 높아 공사를 도울 배의 운행마저 힘들었던 것이다. 바다가 잔잔해 간신히 우도를 건너면 공사를 진행할 시간에 악천후 탓에 작업을 중단하곤 했다.

공사가 계속 늦어지자 일본군은 일본 관용어선을 타고 들어와 현장의 인부들을 모두 해고하고 직접 현장을 지휘했다. 그렇게 예정보다 훨씬 늦은 2년 3개월 만인 1906년 2월에 완공돼 3월에 등대 불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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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가는 길....저물무렵 등대와 사무실에 불이 켜지고 ⓒ 박상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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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 방파제 등대와 머얼리 성산포와 종달포구의 모습 ⓒ 박상건

그렇게 우도등대는 우리나라에서 6번째 등대가 되었다. 맨 처음에는 우도봉 튀어나온 절벽 위에 목재로 세워져 석유 등불을 기둥에 매단 형태였다. 성산포와 대한해협 남동쪽 바다의 야간 항해를 돕는 표지 역할 수준이었다.

등대다운 등대가 된 것은 해방 후부터이다. 1960년 3월에 축전지 및 발전기를 사용하여 전원을 공급할 수 있는 등명기를 달았고, 안개 등으로 불을 밝힐 수 없을 상황에 대비해 무신호기(에어사이렌)를 설치했다.

그리고 2003년 11월 새로운 원형 대리석 구조물로 최신 등대를 옛 등대 옆에 세우고, 2006년에는 일반인들이 등대를 체험하고 쉬어갈 수 있는 등대공원과 문화 공간의 쉼터도 만들었다.

등대가 세워진 후 30년 후인 1932년 우도 해녀들은 자신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상인들이 조합과 야합해 착취하자, 이에 격분해 수백 명이 항일 봉기를 하기도 했다. 등대는 그러한 현장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유례없는 여성들의 항일운동을 기리기 위해 현재 우도 포구에는 해녀상과 해녀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해녀가 많은 우도는 잠수 노 젓는 소리, 잠수소리, 해녀가 등의 민요가 그러한 곡절을 타고 전해오고 있다.

비바람이 불어도 안개 자욱해도, 365일 뱃길을 비추는 등대

긴 세월이 지나 그런 우도를 굽어보고 있는 곳이 우도등대이다. 우도항로표지관리소 이송균(57) 소장은 "우도를 찾는 많은 여행객들이 드넓은 초지와 등대로 향하는 해안가에서 바로 아랫녘 마을로 비켜 내려가곤 한다"면서 "등대가 있는 곳이야말로 우도의 최고 전망 포인트"라고 말했다.

우도의 남쪽 해안선 산책로를 따라 우도봉으로 올라가다 남쪽을 바라보면 성산 일출봉이 바로 옆에서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마주친다. 서쪽으로 바라보면 우도의 섬 전체와 제주도의 한라산 사계절을 그림엽서처럼 바라보며 가슴에 아로새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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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섬과 등대사랑으로 살아온 이송균 우도등대 소장 ⓒ 박상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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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다를 비추는 등대 빛과 어선들의 집어등 불빛 ⓒ 박상건

정상에 우뚝 선 우도등대는 우도 앞바다와 먼바다를 오고 가는 선박의 90%를 차지하는 어선과 부산과 여수, 일본과 중국 등지를 오가는 10%의 여객선과 화물선의 뱃길을 365일 비추고 서 있다.

등대에서 바라보는 대한해협 쪽의 바다는 집어등이 반짝이며 멸치와 고등어를 잡는 어선들의 풍경으로 이채롭다. 또 밤하늘에 네 줄기 불빛으로 수놓으며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모습도 이국적이다.

해안가 가로등 불빛과 어촌의 야경이 어우러지는 우도의 전경은 가히 장관이다. 이는 우도 제4경에 속한다. 봄이면 우도등대 아래로는 노란 유채 물결이 드넓게 출렁이기도 한다.

우도등대는 그렇게 밤마다 20초에 한 번씩 불빛을 반짝인다. 이 불빛이 가 닿는 거리는 20마일(37km).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안개가 자욱한 날은 에어사이렌으로 52초마다 두 번씩 소리를 울린다. 그렇게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은 이 소리를 듣고 위치와 항해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이 소리가 들리는 거리는 5마일(9km)에 이른다.

30년 세월 외딴 섬에서 보낸 등대에 바친 사랑

우도등대 소장 이송균씨. 등대지기 생활 어언 30년째이다. 그이는 완도군 소안도 섬에서 태어나 목포공고 건축과를 나왔다. 천상 섬에서 태어나 섬에서 평생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공고에서 배운 건축기계 기술은 운명적으로 그이를 등대의 길을 걷게 했다. 등대를 고치거나 증축하는 일, 새 기술을 만들어내는 일은 모두 그이의 몫이었다.

첫 딸의 돌이 채 지나기도 전에 최남단 마라도 등대지기로 근무했던 그이. 전기가 귀하던 시절, 도면을 직접 그려가며 풍력발전기를 설계했다. 사비를 털어 작업을 하면서 빚도 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내는 운명에도 없는 해녀 생활을 시작했다. 또 아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양동이를 들고 말똥과 마른 나뭇가지를 줍는 일이었다. 그것은 외딴 섬에서 아랫목을 지필 수 있는 유일한 땔감이었다.

박봉의 등대지기로 사는 일은 표현할 수 없이 힘든 일었지만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자신이 만든 풍력발전기 프로펠러에 막내둥이 얼굴이 5㎝가량 찢긴 일이었다. 어린 딸을 보듬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나가 병원을 찾았지만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다시 서울의 병원으로 이송했다. 아픔의 흔적은 딸의 얼굴에서도 그이의 가슴에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얼마 전 그 딸이 시집갈 때 그 흔적을 보고 다시금 속 울음을 울었다.

등대가 돌아가는 섬에 파도만 우는 것이 아니다. 그 파도처럼 사는 영원한 등대지기 이송균 소장은 또 한 번의 울음을 울었는데, 95년 장인이 세상을 뜰 때였다. 장인은 등대 공사를 하면서 사비를 들이고도 모자라 고민할 때 기꺼이 당시의 거금 50만원을 주었던 분이다.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한 채 고생만 시킨 아내와 50만원 이상의 마음의 빚까지 남아 있는 홀연히 떠나버린 장인을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겁단다.

그러나 등대지기의 일생은 조건 없는 헌신에 있다. 수많은 일 중 기억에 남는 일은 마라도 앞바다에서 표류하는 어선 성진호를 구한 일이다. 등대원들은 엔진 고장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는 직감적으로 연료가 바닥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기름이 귀하던 시절에 등대에만 석유가 보관돼 있었다. 그이는 등대에 있는 석유를 전달하고 가파도로 귀항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호주머니를 털어 등대 예산을 채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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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새벽 바다를 밝히고 선 조일리 앞 바다 무인등표 ⓒ 박상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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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항을 출발한 막배와 노을바다 ⓒ 박상건

표류하는 어선 구하고 등대기술 창안하고... 등대 대중화까지 헌신

그렇게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이송균 소장. 그이는 마침내 등명기 차단기를 창안해냈다. 등명기는 등대 불빛이 4면으로 반짝이는 전구 같은 것이다. 전류를 타고 올라가 빛과 열을 방출하는 필라멘트 같은 역할을 한다.

이 등명기 가격은 4억원에 이를 정도로 등대의 핵심 부품이다. 이 소장은 등명기의 초점이 태양고도와 일직선에서 마주치면 타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태양고도가 수평으로 맞을 때에 차광막에 의해 자동으로 불이 꺼지도록 설계했다. 해양수산부는 이 아이디어를 높이 사서 현재 제주도 일원 모든 등대에 시범 운영 중이다.

추자도 출신으로 2006년 봄부터 우도등대에서 근무 중인 등대원 김순일(37)씨는 "이송균 소장님은 일생동안 등대를 업그레이드하는 일에 바쳤으며 모든 등대원들의 사표"라고 극찬했다.

갈수록 등대는 첨단 시설을 갖추고 원터치 자동화 시스템으로 무인등대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런 휴머니즘적인 등대지기의 일생을 배우고 찬란한 등대문화로 키워질 공간도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 급변해도 등대지기의 헌신적인 사랑만은 바꾸지 못할 것이다. 정년이 1년 남짓 남은 그이는 마지막으로 올여름 우도등대 아래 드넓은 구릉지에서 섬사랑시인학교 캠프를 열 계획이다.

시인들과 함께 야영하면서 시도 읊고 밤하늘을 수놓은 등대도 체험케 하면서 해양문화의 대중화에 일조할 생각이다. 그렇게 애오라지 그이의 등대 열정은 그가 떠나도 등대 불빛만큼이나 뜨겁게 살아남아 영원한 등대 빛으로 광활한 하늘과 푸른 바다를 비출 것이다.

▲ 우도등대로 가는 길

1. 항공 : 김포공항-제주공항
2. 승용차
- 제주공항→동부산업도로→성산포항→차도선 승선→우도
- 제주공항→모슬포→서귀포→남원→표선→성산포항→차도선 승선→우도
3. 대중교통
- 시외버스터미널→성산포행 시외버스 이용→성산포 하차→도보(10분)→도선장→우도
- 직행버스는 없고 1시간 20분소요
4. 배편
- 성산포→우도(1시간 간격 운항. 15분소요)
- 종달항→우도(1시간 간격 운항. 15분소요)
- 동절기에는 단축 운행. 반드시 운행시간 문의 후 출발
- 자세한 문의: 우도해운(064-782-5671), 우림해운(064-784-2335)
5. 기타
- PC방, 주유소, 365일 현금인출기가 있음
- 여름 성수기를 제외하고 깨끗한 민박, 펜션 등을 예약 없이 이용 가능
- 해안가에 야외모임이 가능하고 자연산 회전문집 있음

덧붙이는 글 | 섬과문화(www.summunwha.com)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섬과문화(www.summunwha.com)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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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언론학박사, 한국기자협회 자정운동특별추진위원장, <샘이깊은물> 편집부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한국잡지학회장, 국립등대박물관 운영위원을 지냈다. (사)섬문화연구소장, 동국대 겸임교수. 저서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여행> <바다, 섬을 품다> <포구의 아침>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예비언론인을 위한 미디어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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