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치 않은 이색(李穡) 진영 움직임, '뭔가 있다'

[태종 이방원 24]토지개혁 2

등록 2007.01.06 18:27수정 2007.01.0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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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와중에 있던 1388년 고려는 토지를 갖고 있는 농민의 숫자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 농민들이 땅 한 평 없는 기이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취약한 사회구조가 바로 혁명을 부르는 고려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백성들은 권문세족에게 소작농으로 수탈당하거나 사찰 소유의 경작지에서 노예처럼 일하며 생명을 부지했다.

5년 전. 정도전이 이성계의 함주 군막을 찾아 '조선건국사업'의 첫 삽을 뜬 일이 있다. 첫 삽을 기념하기 위하여 살아있는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결의를 새겨놓은 일도 있다. 그 때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제시한 계획서에 수록된 <고려진단서>는 '구제불능성 사망증후군'이었다.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이었다. 고려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대책 없는 나라였다.


@BRI@매관매직으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원성은 비등점을 웃돌았다. 백성들의 고혈이 소진되자 이제는 먹이감을 동족으로 옮겨 권문세족끼리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권문세족들의 암투는 고려 사직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자신들의 파멸은 물론 바탕을 제공한 왕조마저 위태롭게 했다.

성리학을 수학하여 도덕성으로 무장한 정도전의 눈에 비친 고려는 '식물국가'였고 겨우 명줄이 살아남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중환자였다. 왕비가 소속불명의 아이를 임신하여 왕실을 흔들어 놓은 국가. 왕이 신하에게 살해당하는 세상. 대륙의 정권교체기에 앞 다투어 힘센 나라에 머리를 조아리는 사대관료들이 판치는 조정. 고려는 한심한 나라였다.

천운이 닿아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지위에 서게 되면 마지막 수단으로 토지개혁을 시도해 보고 싶은 것이 정도전의 소망이었다. 이것마저 약발을 받지 않을 경우 '혁명은 필수'라는 단서가 있었다. 이것이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제출한 고려 보고서였다. 행운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그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토지개혁 실시해 비틀거리는 왕조 바로잡자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한마디로 압축되는 토지개혁은 정도전의 위민(爲民)사상이 알알이 녹아있는 정책이다. 왕조 봉건사회에서 땅을 농민에게 준다는 것은 기존질서를 어지럽히는 반동적인 사상이었다. 그저 농민은 소나 말처럼 부려먹고 토지는 왕실이나 권문세족이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인식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한다는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이러한 구상을 입 밖에 내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을 내놓는 거와 같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도전은 해냈다. 여기에서 정도전의 백성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정책도 혁명의 파고에 떠밀려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정도전의 초안을 잘 다듬어 대사헌 조준(趙浚)이 상소문으로 치고 나왔다. 사전(寺田)과 사전(私田)을 몰수하여 땅 없는 백성에게 나누어 주자는 토지개혁 상소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자 백성들은 환호했다. 경향각지의 농민들이 대환영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조민수가 반발하고 나왔다. 이성계라는 '뒷배'가 있는 조준은 맞받아치고 나왔다.


"조민수가 백성들의 땅을 빼앗고 상소문 올리는 것을 방해했다."

폭로성 상소문이 계속 이어지자 결국 조민수가 손을 들었다. 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민수가 패배했다는 것은 혁명군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의 퇴장을 의미한다. 이제 혁명군에는 이성계를 제어할 힘을 가진 세력이 없어진 셈이다. 조민수는 권좌에서 물러나 창녕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숙청과 너무나 닮아있다.

이성계 진영에서 토지개혁을 들고 나온 것은 두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첫째가 착취구조를 개선하여 고려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또 하나는 뚜렷한 비전 없이 혁명세력에 무임승차한 조민수의 제거였다. 조민수는 공민왕이 설정해놓은 친명외교노선을 버리고 친원정책을 표방한 수구꼴통 '이인임'계로서 토지주를 보호하려 했었다.

총론에서 공감하지만 각론에서 대립하는 유학자들

조민수를 마지막으로 구파 군벌은 말끔히 청산되었다. 조정의 제신들도 대부분 성리학을 공부한 학자들로 채워졌다. 마지막 군벌 이성계 하나만 제외하고 불교국가에서 유학자들의 세상이 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혁명적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더 많은 결과를 기대했고 더 빠른 변화를 요구했다.

다행스럽게도 이성계는 구시대 군벌이었지만 유학자들과 대화가 통했다. 케케묵은 구닥다리 군인이지만 새로운 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진중에서 성리학을 틈틈이 공부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유학자들에게 있었다. 도덕성으로 무장한 유학자들이 "고려를 구하자"는 총론에서는 공감했지만 방법론에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고려 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이색과 정몽주, 이숭인을 주축으로 한 수호파와 "뼈를 깎는 개혁만이 살 길이다. 개혁가지고 안되면 혁명도 불사한다"는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각을 세웠다.

병권은 이성계의 손에 있었지만 문인 우위의 균형아래서 서로를 감시하는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상대의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이방원의 정보망을 긴장시키는 것은 이색 진영의 결집력이었다. 이색 진영에 이숭인, 정몽주, 김구용 등이 뻔질나게 드나들며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방원의 안테나에 정확한 것이 걸리지 않아 애를 먹고 있는데 희미하게 포착된 것이 있었다.

명나라 사신이 두 팀으로 짜여 진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 갑자기 두개 팀으로 구성되어야 하는지 아리송한 일이었다. 도저히 분석이 안 되었다. 평소 한 개 팀이 모든 업무를 소화하는 사신 길에 복수의 팀이 시차를 두고 떠난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가지고 아버지와 상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커버린 것을 실감한 이방원

방원은 등청에 앞서 아버지 사제를 찾아 집을 나섰다. 추동 집을 나와 십자로에서 숭인문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불과 며칠 전, 아버지의 회군 소식을 접했을 때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던 길인데 감회가 새로웠다. 선죽교를 건넜다. 이른 아침이라 골안개가 피어오르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우선 만지는 정보의 성격부터 달랐다. 전리정랑직 자체가 관리들의 인사문제를 다루는 직책이라 사람에 관한 정보를 다루는 것이 주 업무였지만 지금 만지는 정보에 비하면 소소하기 짝이 없는 미미한 것들이었다. 말 잔등에 몸을 맡기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어느덧 어배동에 도착했다.

"명나라 사신문제로 소자가 거론되거든 아무 말씀 마시고 받아두십시요. 덕분에 명나라 구경 한 번 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계를 만나자 마자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얘기했다. 뜬금없이 사신이야기가 튀어나오고 명나라 이야기가 튀어나오니 이성계는 무슨 영문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이 가을이다. 되짚어보니 하정사가 거론될만한 시기였다. 중국의 황제가 있는 곳은 금릉(남경)이다. 고려 개경에서 8000리 길. 새해 인사를 하려면 10월 이전에는 개경을 출발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사신을 정기적으로 보내는 것을 1년 3사라 하여 중국 황제에게 신년 인사를 올리는 하정사(賀正使),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춘추사(春秋使) 등이 있었으며 부정기적으로 사은사, 동지사, 주청사, 계품사 등의 이름으로 사유가 발생했을 때 수시로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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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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