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에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었네

충북 단양군 소백산 비로봉에 가다

등록 2007.01.11 10:31수정 2007.01.1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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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인 소백산 비로봉. ⓒ 김연옥

나는 서울에서 보낸 대학 시절을 빼고는 여태껏 고향 마산을 떠난 적이 없다. 남쪽 지방의 포근한 도시에서 살다 보니 겨울이 오면 마치 보고 싶은 친구를 기다리듯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는 풍경이 늘 그립다.

@BRI@마침 지난 9일 눈꽃 산행으로 소백산 비로봉(1439m) 산행을 떠나는 산악회가 있어 나는 무작정 따라나섰다. 아침 8시 마산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은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 새밭마을에서 11시 40분께 산행을 시작했다.

비로봉은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시에 걸쳐 있는 소백산(小白山)의 주봉이다. 그날 하얗게 눈이 쌓인 산길은 평화로운 고요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맑은 물소리에 나는 그 깊은 고요 속에서 깨어났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어디가 계곡이고 어디가 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꺼운 솜이불 같은 하얀 눈이 그 계곡을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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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다리 위에도 하얗게 눈이 내려 앉았다. ⓒ 김연옥

정겨운 다리 위에도, 푸른 소나무 위에도 하얗게 눈이 내려앉았다. 이따금 비스듬히 비치는 겨울 햇살에 녹아내려 나뭇가지에서 부스스 흩날리는 눈가루에도 이내 마음이 설렜다.

앞에서 걸어가는 젊은 여자의 배낭에 매달려, 그녀가 뽀드득거리는 눈길을 밟을 때마다 딸랑딸랑 울어대는 종소리도 싫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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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풍경과 평화로운 고요만이 있었다. ⓒ 김연옥

온 산이 한겨울의 스산함을 숨기고 하얀색으로 두껍게 덧칠을 했다. 그곳에서는 가난도, 슬픈 사랑도, 덧없는 세월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풍경과 평화로운 고요만이 있을 뿐이었다.

문득 얼마 전에 읽은 백석의 시 구절이 생각났다. 흰 눈이 펄펄 내리는 날에 혼자 소주를 마시며 사랑하는 여자 나타샤와 산골 오두막집에서 살고 싶어했던, 한 가난한 시인의 쓸쓸한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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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봉 정상으로 가는 길에.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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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비로봉 정상에 이르는 길. 매서운 칼바람에 나무 계단 양 옆으로 매어 둔 줄에도 흰 눈이 그대로 얼어 붙어 있었다. ⓒ 김연옥


소백산 비로봉 정상이 가까워지자 매섭게 불어대는 칼바람에 몹시 추웠다. 등산용 마스크를 써서 뺨과 코끝은 얼얼하진 않았지만 사진을 찍으려니 손이 매우 시렸다. 비로봉 정상으로 이르는 나무 계단 양옆으로 매어둔 줄에는 하얀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손으로 툭 건드렸더니 매서운 바람결에 푸시시 날아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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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비로봉 정상. 그날 바람이 몹시 불었다. ⓒ 김연옥

비로봉 정상 위로 아스라한 하늘이 참으로 멋들어지게 보였다. 매서운 칼바람에 밀려가듯 하며 비로봉 정상에 이른 시간이 낮 2시 10분께. 정상에도 바람이 많이 불고 손이 너무 시려 도저히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나는 서둘러 단양읍 천동리 쪽으로 가는 길로 내려갔다. 조금만 걸어가면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초소가 나와 거기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등산객들이 많아서 먼저 와 있던 일행 몇몇과 겨우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먹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먹다 남은 쓰레기들을 그대로 수북하게 쌓아 놓고 가버려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산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내버리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 속상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새해부터 전국 국립공원의 입장료 징수가 폐지된 만큼 산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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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리로 내려가는 길의 하얀 겨울 풍경. ⓒ 김연옥

소백산에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朱木) 군락(천연기념물 제244호)이 제1연화봉(1394m)에서 비로봉 사이의 북서 사면(해발 1200~1350m)에 분포하고 있다. 소백산 주목들의 수령은 200~800년이고 평균 수령이 350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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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 있던 주목.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의 처연한 위엄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 김연옥

천동리로 내려가는 길에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채 우뚝 서 있던 주목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보다 훨씬 몇 곱절이나 더 오랜 세월을 잘 버텨온 그 나무 앞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수백 년 풍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처연한 위엄이 서려 있는 그 나무 밑에서 나는 더 머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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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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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리로 내려가는 길의 설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 김연옥

그곳의 설경 또한 참 아름다웠다. 등산객들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그 예쁜 풍경을 사진에 담기 바빴다. 거기서 머무적거리고 있는 내게 일행들이 하산 시간에 맞춰야 한다고 어찌나 재촉하는지 할 수 없이 하얀 눈길을 따라 서둘러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침밥 먹고
또 밥 먹는다
문 열고 마루에 나가
숟가락 들고 서서
눈 위에 눈이 오는 눈을 보다가
방에 들어와

밥 먹는다

- 김용택의 '눈 오는 집의 하루'


마산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내 마음 속에는 눈이 펑펑 오는 마을에서 한번 살아 봤으면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김용택 시인의 '눈 오는 집의 하루'처럼 밥을 먹고 마루에 나가서 끝없이 내리는 눈을 보다 다시 방에 들어가 또 밥 먹는, 그런 집에서 한번쯤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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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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