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박. 명. 순.'

겸손해지는 지혜를 주신 할아버지께 이제야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등록 2007.01.11 13:57수정 2007.01.1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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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이름 되게 촌스럽네요."
"그러는 자매님도 만만치 않은데요?"



봉사모임 하나 만들어볼 요량으로 친분은 없지만 같은 동네 사는 교우라는 명목으로 예닐곱 명이 뭉쳤다. 서먹함을 지우기 위해 송년회 삼아 달다름한 누룽지 막걸리로 유명한 주점에 모여 잔을 들어 건배를 외치며 각자 통성명을 했다.

@BRI@아이 낳은 여자들의 기억력은 세상이 알아주는 바, 통성명은 했어도 영명에 묻혀 쉽사리 기억해내지 못할 것을 염려해 제일 막내격인 마리나 자매가 살뜰하게도 깔끔히 코팅된 주소록 명단을 가방에서 꺼내 건넸다.

그 중 한 자매님이 명단을 눈으로 쓰윽 훑어 내리다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넘어진 것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자는 뜻이다. 내 이름은, 박(朴) 명(明) 순(順)이다.

그 순간 내 이름 석 자에서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아들 둘을 낳고 첫딸로 나를 얻은 엄마는 집안의 살림밑천인 딸애의 이름을 직접 지어주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불안했다. 한문에 조예 깊은 할아버지가 이미 작명을 해놓고 기다리셨기 때문이다.


출생신고를 늦추고 일 년을 머뭇거리다, 병고 중에 계신 시아버지의 뜻을 차마 거스를 수 없던 엄마는 하는 수 없이 내 이름을 그대로 호적에 올렸다. 어린 손녀가 밝고 순하게 자라서 조신한 여성이 되길 바라는 소망을 이름 속에 꼭꼭 심으셨는지, 나는 정말로 밝고 순하게 자라났다.

마치 당신의 목숨을 내게 이어주듯 그 해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얼마 후 엄마는 내 밑으로 또 딸을 낳았다. 엄마는 동생의 이름을 짓는 데 여러 날을 고심했단다. 그 이름도 흔한, '영희'다.


엄마가 생각해낸 예쁜 이름이 고작 '영희'였다니. 학교에 들어간 동생은 1학년 국어 교과서 처음 단원에 나오는, '영희야 놀자, 철수야 놀자'로 얄궂은 놀림을 견뎌야 했다.

'순, 숙, 심, 선, 옥, 임, 미.'

그 시절 여자애들이 흔하게 달고 다니던 이름 끝 자다. 왜 하필이면 그중에 제일 촌스러운 '순' 자를 골라 썼을까.

사춘기 시절, 이름 석 자로 내 인생을 올가미 씌워 버린 할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ㄴ' 자를 뒤집어 'ㄱ' 자로 대신했어도 한결 덜 촌스럽다는 생각을 나만 했던 게 아닌지, 사촌언니는 이름 끝 자를 '숙' 자로 일부러 바꿔 불러주곤 했다.

a '경숙이'의 벨벳코트를 빌려입고

'경숙이'의 벨벳코트를 빌려입고 ⓒ 박명순

국민학교 3학년 무렵, 엄마가 다니던 시멘트 포대 자루 공장 사장 딸인 '경숙이'에게 나는 자주 화가 났다. 그 아이는 걸핏하면 멀쩡한 내 이름 대신 '맹순이'라 부르며 놀렸다. 정말 맹했던 건지, 아니면 할아버지의 염원 때문이었는지 나는 화도 잘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벨벳 소재의 긴 코트를 입고 다니던 그 아이와 골목에서 마주쳤다.

"너는 이런 거 입어본 적 없지?"

한 번도 새 옷을 입어보지 못한 나는 그 아이가 휙 까불리며 벨벳 코트자락이 내는 바람소리에 그만 가슴에 상처가 났다. 그 순간 머리채라도 낚아 올리고 싶었지만, 나는 내 이름값대로 살아야 할 착하고 바른 어린이여야 했으므로 눈으로 힘껏 째려보고 그냥 지나쳤다.

그해 겨울, 막 중학생이 된 오빠를 축하 겸 처음으로 가족사진이란 걸 찍게 되었다. 아, 그때의 좌절감이란. 엄마는 경숙이의 벨벳 코트를 빌려와 내게 입히는 게 아닌가. 경숙이의 비웃음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경숙이는 그 사실을 동네 아이들한테 소문을 냈고, 나는 또래들 사이에서 졸지에 옷 빌려 입는 가난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착한 어린이가 참아 내기엔 모멸감이 너무나 컸다.

햇살이 따사롭던 어느 봄날, 나는 그 아이 방에 몰래 들어가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새 교과서 두 권을 들고 나와 더러운 시궁창에 던졌다. 나는 더는 밝거나 순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 무렵 한창 유행하던 팝송 책 펜팔 난에는, 하나같이 예쁘고 고운 이름들이 올라왔다. 세련된 생각을 한 부모들이었거나, 굳이 실명을 올릴 필요도 없는 곳이니 가명일 게 분명했다.

푼돈 챙기는 재미에 '기준'이란 가명으로 펜팔을 하는 오빠의 편지 배달을 도와주던 나는 어느 날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름으로만 알고 지내던 여학생 '강미희'를 드디어 광화문 빵집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이름만큼이나 예쁠 줄 알았던 여학생은 그저 밉상만 면한 외모였나 보다. 빵집에서 그만 우유를 쏟는 바람에, 친절한 그 여학생은 얼른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여학생이 건네 준 손수건으로 탁자 위를 닦다 무심코 보게 된 이름 석 자, '강 공 순'. 분홍색실로 학년 반과 함께 수놓아진 이름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더란다. 가명끼리의 만남이 허허로웠던지, 오빠는 그 일 이후로 펜팔을 그만두었다.

개명에 대한 허가 기준이 완화되면서, 부모들이 일방적으로 지어 준 이름으로 인해 심리적인 열등감에 시달렸던 사람들이 법원 앞에서 러시를 이룬다고 한다. 무성의하게 여겨지는 수많은 이름들, 발음이 어렵거나 가족의 성과 연결해 부를 때 엉뚱한 상상을 초래하는 이름들도 함께 줄을 섰다. 입신양명을 위해 제법 세련된 이름들도 줄을 섰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손녀가 세상을 '밝고 순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내 이름에 그렇게 주술을 걸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름값을 하며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다. 너무 거창한 이름에 눌려 스스로 지치지 않게, 소박한 이름이 가진 평범한 삶의 소중함을 통해 겸손해지는 지혜를 주신 할아버지에게 이제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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