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피어난 서향나무의 꽃은 벌써 지고 끝 무렵이어서 그런지 열매가 달렸다. 서향의 꽃을 따 말려 놓았는지 실내에 들어오자마자 서향의 향기는 이미 두 사람의 후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서향은 여산(廬山)의 비구승(比丘僧)께서 꿈속에서 그 향기를 맡고는 그것을 잊지 못해 심산유곡을 뒤져 찾아낸 것이라 하죠. 아마 그 비구는 서향을 부처의 향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BRI@우슬의 고개가 창밖에서 두 사람 족으로 돌려졌다. 영롱한 보석을 박아놓은 듯한 그녀의 눈은 맑고 투명했다. 허나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두 사람의 시선과 마주치는 적이 없었다. 본래 다른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는 일을 싫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의례 사람들은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 시선을 마주치는 일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있음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사람처럼,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그녀는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서향을 좋아하오만…, 나는… 아니 지금 우리는…."
설중행이 의식적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다시 입을 열자마자 또 중간에서 말을 끊었다. 차에는 서향의 말린 꽃잎을 섞어 넣었는지 서향의 향기가 입 안에 오랫동안 감돌고 있었다.
"아니오. 당신은 서향을 좋아하지 않아요. 단지 서향을 풍기는 여자의 욱체를 탐닉할 뿐이죠."
그 말에 우슬의 옆에서 차를 따르던 어린 시비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의 입에서 이런 류의 말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오늘 아가씨의 행동은 아주 이상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모시는 주인은 그저 슬며시 웃거나 마지못해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먼저 말을 한다거나 누구를 탓하는 듯한 말은 그녀의 기억 속에 한 번도 없었다. 특히 상대가 사내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허나 정작 놀란 사람은 설중행이었다. 부드럽고 청아한 목소리였지만 그 말은 비수가 되어 설중행의 가슴에 꽂혔다. 숨이 턱 막혀왔다. 도대체 어떤 뜻으로 한 말일까?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떤 사실을 알기에 이런 말을 하는가?
서향을 풍기는 여자의 육체는 분명 궁수유를 뜻함이었다. 허나 그 일을 우슬이란 이 여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정말 그 일을 알고 말하는 것일까?
"내가 어찌하든 소저가 간섭할 것은 없소. 나는 여기에 조사를 하러왔고…."
사람은 자신의 비밀이나 치부가 드러날 때 그것을 가만히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역정을 내는 묘한 버릇을 가진 동물이다. 설중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슬이 궁수유와의 일을 알든 모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일을 가지고 자신을 비난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더구나 자신도 어릴 적 서향을 좋아한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서향의 향기에 취해 어느 구석에서 잠이 들곤 했으니까….
하여튼 설중행의 말은 또다시 중간에서 끊겼다.
"많이 변했군요. 본래 가진 기질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요."
그 말을 들은 설중행은 갑자기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이었다. 이미 알고 있다. 모든 것이 분명해 졌다. 저 여자는 이미 자신을 알고 있다. 그것도 누구보다 더 자세하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나… 나를 알고… 있었소?"
처음으로 떠듬거리기는 하나 말을 마친 셈이었다. 우슬의 눈은 때론 가늘게, 때론 동그랗게 뜨며 설중행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설중행의 눈빛과 마주쳐지지 않았다.
"나로 하여금 운무소축 주위에 서향을 심게 만든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서향을 좋아하게 만든 사람이니까요."
"내… 내가…?"
기억에 없었다. 어릴 적 이 계집애를 만난 적도 몇 번 되지 않았으니까? 더구나 언제나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던 여자아이였다. 말을 붙이고 싶어도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 같아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언제…?
"서향은 짝을 만나야 꽃을 피우는 나무에요. 서향을 즐기려면 암수 두 그루의 나무를 심어야 하죠. 그래서 서향은 언제나 사랑을 꿈꾸는 나무라고도 하죠."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났다. 서향이 암수 딴 몸이라는 것을 알고는 얼마나 신기했던가? 누구에겐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허나 내가 이 이린 계집아이에게까지 말한 적이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당신은 사람을 착각한 것 같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조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형식적으로나마 하려 했던 조사였다. 어느 틈엔가 말 몇 마디에 이미 그녀가 의도하는 대로 모든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왠지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떻소?"
설중행이 능효봉에게 말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능효봉이 설중행의 손을 지그시 잡으며 일어나는 것을 제지했다.
"일은 마치고 가야지…."
그러자 우슬이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아직까지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그 어리석은 버릇은 버리지 못했군요."
그녀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자 방안은 온통 우울한 분위기로 변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다른 사람들까지 그런 감정에 빠지게 하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자 설중행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당신을 모르오. 당신 역시 나를 모르오. 내가 어떤 인간이든 당신이 비난할 일은 아니오. 나는 지금 기분이 매우 나빠졌소. 나는 가겠소."
우슬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설중행이 자신을 잡은 능효봉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의 바로 등 뒤에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차가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아가씨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이곳에는 들어올 때도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나갈 때도 역시 아가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목소리의 임자는 바로 흑의무복을 입고 한쪽 구석에 목상처럼 앉아있던 여인이었다. 언제 그의 뒤로 다가왔던가? 어느새 뒷덜미에서는 차가운 금속이 닿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칼이나 예리한 흉기가 자신의 뒷덜미에 놓여져 있을 터였다. 화가 나 잠시 경각심을 잃었다고는 하나 누군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순간까지 놔두었다는 것은 무림인으로서는 있어서 안 될 일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고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래도 목숨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무모한 자는 아니군."
설중행이 함부로 고개를 돌리거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칭찬이었다. 종종 무림인들은 만용을 부릴 때가 많다. 자신의 검이 상대의 몸을 벨 때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상대의 검이 자신의 몸을 벨 수 있으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위험이 닥치면 동물적인 본능이 시키는 대로 가만있는 것이 좋다. 위험이란 것은 몸부림칠수록 빠져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것은 상대의 오산이었다. 자리에 그대로 앉으라는 듯 지그시 누르는 예리한 금속의 느낌에 상체를 숙이며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설중행의 상체가 더욱 낮춰짐과 동시에 상체를 빙글 돌리며 왼발을 쭉 뒤로 뻗어나갔다. 상대의 정강이를 노리는 공격이었고, 뒤이어 재차 다리를 바꾸어 오른발로 상대의 허리를 노리고 돌려찼기 때문이었다.
허나 흑의무복의 여인은 확실히 고수였다. 빠른 설중행의 공격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슬쩍 몸을 비틀어 설중행의 발 공격을 피했을 뿐 아니라 검을 뽑지 않은 채 설중행의 뒷덜미에 갖다대고 있었던 검 집은 여전히 설중행의 뒷덜미를 노리며 따라붙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마음만 독하게 먹는다면 검 집 만으로 설중행의 천주혈(天柱穴)이나 대추혈(大椎穴)을 때려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