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실타래를 타고 오네

어쩌면 우리 서로 원했던 건, 따뜻한 말 한마디였을지도 모른다

등록 2007.01.12 14:13수정 2007.01.1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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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에미야. 큰일났다."
"…?"



요사이 들어 부쩍 소화도 안 되고, 숨도 가쁘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편이 병원에 다녀왔다. 이런저런 검사를 하면서도 행여 잃어버릴새라 목에 두르고 놓지 않던 목도리를 폐활량 검사실에 그만두고 온 모양이다. 목도리를 풀어야 검사할 수 있다는 간호원 말에 대기실 의자에 잠시 벗어둔 걸 깜빡 잊은 것이다.

@BRI@시어머니 생신을 맞아 올해는 뭔가 정성스런 선물을 하고 싶었다. 마침 추운 겨울이고, 간혹 깊은 밤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에 힌트를 얻어 고운 털실로 목도리를 짜 드리기로 했다.

분홍색 털실을 샀다가, 너무 튀는 거 같아 점잖은 색으로 다시 바꾸기를 몇 번. 한 뼘쯤 짜놓고 보니 아무래도 밋밋해 반짝이실 두 타래를 사와 섞었더니 그나마 고급스러운 게 마음이 흡족했다.

생신 당일 깜짝 놀라게 할 요량으로 어머니 안 보는 데서 뜨개질을 하다 보니, 직장에서의 여유 시간으로는 너무 빠듯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든 어둔 밤, 어머니가 잠든 사이 방문을 닫고 하룻밤을 새워서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뜨개질을 하는 동안, 많은 생각이 밀려왔다 밀려갔다. 큰 소리 내며 투덜대던 모습 위로 서로 등 때를 밀어주며 세월에 장사 없음을 안타까워하던 모습이 겹쳐 지나갔다. 복도가 울리게 언성을 높이며 서로 가슴에 벼린 칼을 들이댄 적도 있었다. 밉다가 고왔다가, 얄밉다가 고마웠다가, 불쌍했다가도 괘씸한 마음으로 수행을 일삼는 나날들이었다.


한 코 한 코 고리 지어 단 쌓여갈 때마다 미움은 뭉개지고 사랑이 싹이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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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고 남은 실 짜투리 ⓒ 박명순

어쩌면 우리 서로 원했던 건, 따뜻한 말 한마디였을지도 모른다. 한 코 한 코 고리를 지어 단이 쌓여갈 때마다 미움은 뭉개지고 사랑의 싹이 텄다. 사랑의 싹을 엮어 내 마음을 담아 모두 드리리. 목도리의 포근함이 당신의 목을 감쌀 때마다, 며느리에 대한 야멸친 마음도 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리겠지.


드디어 생신 날 저녁, 조촐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 온 가족이 모였다. 온 가족이라야 매일 밥숟갈 부딪치며 사는 우리 식구가 전부지만, 찾아오지 않는 다른 자식들에 대한 미움을 접고 아주 오랜만에 어머니는 아이처럼 선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이들의 축가와 케이크 컷팅이 모두 끝나자 돈 봉투와 함께 식탁 밑에 꼭꼭 숨겨 두었던 꾸러미를 내밀었다. 상장을 주고받듯, 얼떨결에 내민 어머니의 두 손이 멋쩍었다. 까르르 한바탕 웃음이 봇물처럼 터졌고, 어머니는 목에 두른 목도리를 연방 만지작거렸었다.

서랍 속에서 처방전을 찾아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잘 있을 줄 알았던 목도리는 아무도 모른단다. 내 공로가 물거품이 되는 게 속상한 것보다, 내게 미안해 할 어머니가 먼저 걱정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울상을 지으며 며칠 동안 끌탕을 했다.

"아이고, 분명히 내 옆에 있는 그 늙은이가 들고 갔을 거야. 왜 남의 것을 탐하고 그래. 그러니까, 늙으면 다 죽어야 한다니까."

"차라리 잘 됐어요, 어머니. 또 짜 드릴게요. 어차피 어머니한테 색깔도 잘 안 어울리고. 제가 잘 몰라서 너무 두껍게 짰어요. 담엔 아주 촘촘하고 얇게 짜 드릴게요. 그 할머니한테 어머니가 선물한 거라 생각해요. 알았죠?"

"내가 에미한테 미안해서 그렇쟈."


사랑이 별건가. 서로 걱정하고 미안해 하는 이런 마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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