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촌뜨기, 천자의 나라 금릉에 서다

[태종 이방원 28] 황성에 들어가다

등록 2007.01.16 10:38수정 2007.01.1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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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사 일행은 고려의 유민들이 향수를 달래며 모여살고 있는 고려촌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것과 같은 따뜻한 정이 담긴 환대였다. 청국장에 밥 먹어본 것이 언제였나 싶었다. 잃어버린 고향을 오랜만에 찾아온 거와 같은 정겨운 대접을 받고 하룻밤 푹 쉰 다음 발길을 재촉했다.

연교보와 파리보(巴里堡)를 지나 드디어 북경에 입성했다. 압록강에서 2030리 39일 만이다. 하지만 북경은 황제가 있는 수도가 아니었다. 황제는 그보다 남쪽 금릉(남경)에 있었다.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다스리는 북방의 큰 고을에 불과했다.


대륙의 정복자 원나라를 북방으로 밀어내고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주원장은 26명의 아들이 있었다. 광활한 대륙을 석권한 주원장은 주요 거점을 아들들에게 할양하여 통치하도록 했다. 그 넷째 아들 주체(朱棣)에게 왕으로 봉해준 곳이 오늘날 북경이며 그 당시에는 북평부(北平府)라 불리었다. 훗날, 조카 혜제를 폐하고 왕위에 오른 주체는 영락제가 된다.

몽고족에게 짓눌렸던 설움을 털어버리고 한족(漢族)의 웅비를 준비하며 생동감 있게 발전하고 있는 북평은 인상적인 도시였으나 지체할 수 없었다. 아직도 갈 길이 바쁘다. 북평에서 심양 가는 거와 비슷한 1400여리를 더 가야 금릉에 닿는다. 명분이 하정사이니만큼 새해가 되기 전까지 금릉에 도착해야 한다. 사신 일행은 발길을 재촉하여 남행길에 올랐다.

하정사보다 먼저 황제를 알현하여 '친조' 청하라

@BRI@한편, 이색을 정사로 한 하정사(賀正使) 일행이 산해관을 통과하던 11월 초순. 개경에서는 이색의 밀명에 따라 또 하나의 사신이 출발했다. 강준백을 정사로 하고 이방우를 부사로 삼은 주청사(奏請使) 일행이다. 이방우는 이성계의 맏아들이다. 군부의 실력자 이성계를 견제하기 위하여 두 아들이 명나라 사신에 차출된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명 태조 주원장으로 하여금 "고려 국왕은 친조(親朝)하라" 는 명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나이 어린 창왕이 주원장의 눈도장을 받아야만 군부세력으로부터 고려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한 이색의 전략이었다.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주청사 일행은 요동에 도착했다. 도총관에게 황제를 배알(拜謁)하러 가는 사신임을 통보하고 곧바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정사 보다 먼저 금릉에 도착하기 위해서다. 멀리 우회하는 육로 심양을 피하여 지름길을 택한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해로였다. 주청사 일행은 대련에서 뱃길을 이용하여 발해만(渤海灣)을 따라 남행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직항로를 이용하여 서해를 건너면 될 일을 왜 발해만으로 돌아가느냐고 의아해 할 수 도 있다. 그 이유의 첫째는 요동에서 사신입국을 통보하는 것이요, 둘째는 바다에 대한 공포감이다. 바다 끝으로 나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상존한 시대였으므로 조그만 객선(客船)으로 대해를 횡단하는 것은 곧 죽음의 길로 인식되었다.


바다는 무섭다, 그래도 지름길을 택하라

이로부터 104년이 지난 후,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이 태평양을 횡단하는 시대였으므로 선박 건조술이나 항해술이 미약했다. 물론 당나라의 수군이 고구려를 공략할 때 서해를 횡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전선(戰船)이었으며 함대를 이루었다. 어부들이나 조그만 배를 탄 사람들은 시야에서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공포감에 휩싸였다.

당시 사신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뱃길을 이용하는 것을 금기시 했다. 위험한 뱃길에서 불의의 사고라도 당하면 황제에게 바치는 표문(表文)과 봉물이 훼손되는 것을 불경(不敬)으로 간주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보다 표문을 더 중하게 여겼다.

대련에서 조그만 배에 몸을 실은 일행은 발해 연안을 따라 남행을 계속했다. 강소성 어귀에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남경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했다. 하정사 일행이 금릉에 도착하기 전에 황제를 알현하라는 이색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황제를 알현하고 떠난 직후 하정사 일행은 금릉(남경)에 도착했다.

고려의 촌뜨기 이방원의 눈에 비친 금릉은 별천지였다. 문명이 꽃피는 세계의 중심 명나라의 수도 남경은 분명 딴 세상이었다. 고려의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금릉에 21살 청년 이방원이 서있는 것이다. 황제가 있는 금릉에 두 발을 딛고 서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서장관의 신분을 떠난 일개 자연인으로서 이방원은 가슴이 뛰는 흥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천하의 명당에 자리 잡은 신생국

사통팔달로 뚫린 도로는 수레 30여대가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으리만큼 넓었으며 길은 돌을 깔아 포장되어 있었다. 집들은 금색과 적색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였으며 길가에 늘어선 점방에는 갖가지 물건들이 그득그득 싸여 있었다. 한족(漢族)이 6조(朝)조에 걸쳐 도읍지로 선택했던 고도(古都)임을 말해주듯이 고색창연했다.

동쪽에 있는 종산(鐘山)과 서쪽 구릉 완남(晥南)에 안겨있는 금릉은 일국의 수도로서 손색이 없었다. 이방원은 삼국지를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무릎을 쳤다.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 손권(孫權)이 오(吳) 나라를 세울 때 도읍지로 왜 금릉을 선택했는지 그 탁월한 혜안에 탄복했다.

그 뒤를 이어 동진(東晋), 송(宋)나라, 제(齊)나라, 양(梁)나라, 진(陳)나라, 남당(南唐) 등 새로운 왕조를 열어나간 중국의 군주들이 대륙 천지에 하고많은 땅들을 놔두고 금릉에 도읍지를 정한 이유에 대하여 공감이 갔다.

종산은 예전에 자금산(紫金山)이라 불렀으나 초(楚)나라 위왕(威王)이 월(越)나라를 대파하고 금릉을 바라보니 제왕의 기가 서려있어 그 기를 누르고자 금으로 만든 인형을 묻어 그 왕기를 눌렀다 하여 종산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예부 관원의 설명을 들었을 때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마디로 금릉은 천하의 명당이었다. 태어 난 지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은 명나라이지만 참으로 좋은 곳에 도읍지를 정했구나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좋은 터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명나라는 욱일승천 하겠지만 한편으로 고려는 한동안 시달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우울했다.

위풍당당 금릉성을 바라보고 위압감에 눌렸다

동쪽에 우뚝 솟아있는 종산(鐘山)을 중심으로 높이가 60여척(20여m)의 성벽이 100여리(33.67km)에 달하는 금릉성은 웅장했다. 고려의 석성과 달리 벽돌로 쌓은 것이 이채로웠다.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벽돌에 벽돌을 만든 사람과 벽돌을 쌓은 사람의 실명을 기록해둔 것으로 보아 축성 당시의 공포감을 엿볼 수 있었다.

가로 300척(90m) 세로 420척(128m)에 4중문으로 되어있는 중화문(中華門)을 바라보았을 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웅대함에 개경에서 크다는 숭인문이나 선의문은 민가에 있는 솟을대문 정도로 여겨졌다.

전체 3층으로 되어있는 중화문은 병사들이 걸어서 오를 수 있는 계단이외에 상층까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는 마도(馬道)가 별도로 개설되어 있었다. 말을 타고 문루에 오른다는 것은 상상해보지 못한 기발한 구조였다.

좌우로 열리는 갑문형 천급갑문(天及閘門)은 변방의 촌뜨기를 주눅 들게 하는 위압감이었다. 적이 침입했을 때 아치형의 통로 위에서 통째로 문이 내려오는 장병동(欌兵洞)은 이곳이 황제가 있는 요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황성의 정문 중화문을 통과할 때는 그 무엇인지 모를 중압감이 어깨를 짓눌러 왔다.

대종정(大鐘亭)에는 몇 개월 전에 완성한 높이 14척(4백27cm), 구경 7.5척(2백29cm)에 무게가 자그마치 3만8천근(23t)이나 되는 거대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높이 100척(30m)에 이르는 고루(鼓樓)에 큰 북이 매달려 있었는데 성내 어디에서도 북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히 대국다운 풍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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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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