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는 여행을 두려워한다

[내가 만난 아프리카 ⑪] 서로 다른 여행객 4명이 만나다

등록 2007.01.17 17:09수정 2007.07.0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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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같이 잘 생긴 아일랜드 출신 젊은 오토바이 여행객

오후 4시쯤 빨래를 끝내고 방안에서 피곤한 몸을 쉬고 있는데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 보니 대형 트럭위에 오토바이가 실려 있다. 운전사와 현지인 2명이 끙끙거리면서 오토바이를 차에서 끌어내리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호기심에 밖으로 나와 트럭 짐칸에서 오토바이를 내리는 것을 도와주웠다. 오토바이 자체가 워낙 대형인데다 무겁기는 태산 같은 돌덩이를 옮기는 것 같다. 4명이 나무 깔판을 이용해 오토바이를 간신히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오토바이를 트럭에서 내리는 것을 차 옆에서 쭉 지켜보고 있는 젊은 백인남자가 있었는데, 바로 오토바이 운전사였다. 왼손에 붕대를 감아 흰 천으로 목에 걸고 있었다. 수단에서 에티오피아 국경을 넘자마자 마주오던 자동차와 약간 스치면서 넘어져 다쳤다는 것이다. 인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트럭을 불러 오토바이를 싣고 온 것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고, 왼손을 약간 삔 정도였다. 1주일 정도 붕대를 감고 있으면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데 별 지장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키가 크고 잘 생긴 젊은 오토바이 여행객을 보고있으니, 마치 체 게바라를 보는 듯했다. 내가 "오토바이 타고 여행하는 모습이 체 게바라 같다"고 말하자 자신도 게바라를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게바라도 젊은 시절 친구하고 오토바이 타고 남미 여행을 즐겼다"고 내가 말을 이어가자 그는 "나도 (체 게바라의 오토바이 남미여행을 그린)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말한다.

"어디서 왔느냐?"
"아일랜드에서 왔다."
"어, 게바라도 아일랜드계로 알고 있는데…."
"내가 그래서 게바라를 더욱 좋아한다."


체 게바라의 피에는 혁명의 유전자가 흐른다

@BRI@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서로에게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다. 게바라는 실제 아일랜드계 할아버지와 스페인 바스크계 할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는 영국이라는 강대국 곁에서 식민지배와 독립, 북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과격한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북아일랜드와의 통합을 둘러싼 오랜 투쟁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고, 스페인 바스크족은 피레네 산맥에 살면서 오랫동안 스페인을 상대로 한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다.

게바라의 몸에는 태어나면서부터 '끓는 피'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게바라가 자유와 인간해방, 평등을 위한 투쟁에 자신의 삶을 바친 것은 피할 수 없는 유전적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일랜드 젊은이는 아일랜드에서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유럽을 내려오면서 이집트, 수단의 누비아사막을 거쳐 에티오피아까지 달려왔다고 한다. 앞으로 케냐를 거쳐 탄자니아, 잔지바르, 말라위, 잠비아, 나미비아, 남아공 케이프타운까지 갈 계획이라고 했다. 내가 가려는 목적지와 거의 비슷했다. 오토바이를 보니 KTM 상표가 붙어 있다. 처음 보는 이름이다. 오토바이하면 우리나라의 대림이나 효성 그리고 미국의 할리 데이비슨, 일본의 혼다, 야마하 정도나 알고 있었다.

KTM 오토바이가 어느 나라 것이냐고 묻자 오스트리아에서 생산되는 것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같이 사막이거나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데는 최고라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이 젊은이가 타고 온 오토바이는 바퀴도 특수 타이어를 끼었는지 일반 바퀴보다 훨씬 크고, 차체도 무거울 뿐 아니라 크기가 일반 오토바이의 1.5배는 더 되어 보였다. 보통 남자 혼자서도 차체를 일으켜 세우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오토바이다. 내가 오토바이에 관심을 갖는 것은 사회생활을 은퇴하면 언젠가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리라는 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사람을 만나면 마치 이웃을 만나는 느낌이다. 게바라의 먼 고향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역사와 기질이 우리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한이 많은 민족이면서도 강대국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며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독립심 강한 사람들이다.

내가 오래전 중국의 단둥지역을 방문했을 때 알게 된 '푸른 눈의 항일운동가'도 바로 아일랜드 사람이었다. 1919년 단둥에서 무역상을 하던 '조지 L 쇼'라는 이름의 아일랜드 사람은 자신의 회사 사무실을 상하이임시정부의 연락처로 사용하도록 하는 등 우리 독립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당시 아일랜드도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피식민지 국민으로서의 동병상련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쇼는 외국인으로는 드물게 우리정부에 의해 지난 1963년 독립장을 수여받고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나는 그래서 아일랜드 사람을 보면 체 게바라와 함께 '조지 L. 쇼'를 떠올린다.

에티오피아 지방에도 월드컵 축구 길거리 응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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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다르 시내 한 가운데에 솟은 왕궁앞의 빈터가 월드컵 중계 전광판 광장 ⓒ 임상권

내가 낮에 만난, 자전거로 세계 여행을 하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여행객과 저녁 약속을 했다며 같이 가자고 하자 이 젊은 아일랜드 오토바이 여행객도 흔쾌히 동의한다. 숙소에서 나와 저녁 식사를 하러 걸어가는데 왕궁 앞의 빈터 광장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 있고 "와"하는 함성소리가 들린다.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길거리 축구 응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서울 광화문 광장 앞에 있는 대형 스크린 자막인 전광판을 통해 축구경기를 보면서 응원하듯이, 곤다르 왕궁의 빈터 광장에도 임시로 대형 스크린 전광판을 설치해 놓았다. 우리나라의 길거리 응원이 에티오피아 시골까지 수출된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월드컵 축구경기가 에티오피아 곳곳을 흥분시키고 있는 장면을 또다시 목격했다. 물론 화면이 우리나라처럼 선명하지 못해 선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으나 옷 색깔로 어느 나라 선수인가는 충분히 구별할 수 있었다.

곤다르 시내 극장의 뒷골목에 있는 '얄루아이키 카쎄'라는 조그만 식당 겸 바에 들어가니 이미 스위스와 이탈리아 자전거 여행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각각 세계 일주를 위해 출발했는데, 수단 사막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어 에티오피아 곤다르까지 함께 오게 되었다는 것.

티베트 등 고산지대에 사는 소로 힘의 상징인 '야크(yak)'라는 별명을 가진 스위스 여행객이 재미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바로 "인천, 서울, 부산"이라고 줄줄이 말한다. 우리나라 지명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해서 깜짝 놀랐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지며 어떻게 한국의 지방도시까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지난 1996년 자전거를 타고 한국을 여행한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말한다.

실제 이름이 클로드 마살러인 스위스 여행객은 지난 94년 3월부터 2001년 6월까지 무려 7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스위스에서부터 세계 일주를 했는데, 지난 96년 11월 중국을 거쳐 한국의 인천항으로 들어와 자전거를 타고 서울과 부산까지 종단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한국 자전거 종단 이야기가 "monk's newspaper(가톨릭신부 신문)라는 주간지에 실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가톨릭교단에서 간행하는 주간 <평화신문>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국 자전거 여행기가 자신의 홈페이지(www.yaksite.org, www.redfish.com/yak)에도 실려 있다며 직접 홈페이지 주소를 적어 주었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꼭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그 많은 나라를 다 돌아다녔을 텐데 우리나라의 지명뿐아니라 신문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이 스위스 여행객은 이번이 두 번째 자전거 세계일주 여행인데, 지난 2005년 10월부터 시작해 그동안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수단을 거쳐 에티오피아까지 왔으며 앞으로 지부티를 거쳐 인도의 몸바사로 갈 계획이라고 했다. 아일랜드 출신의 오토바이 여행객, 스위스와 이탈리아 출신의 자전거 여행객, 한국 출신의 배낭여행객인 나를 비롯해 4명의 여행객은 처음 만났지만 밤늦도록 곤다르에서 나는 다셴 맥주를 마시면서 친구가 되었다.

국적이 다른 자전거와 오토바이, 배낭여행객 4명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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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세계 여행하는 스위스의 클로드 마살러와 함께 ⓒ 김성호

스위스 여행객에게 7년 동안 자전거로 세계 일주를 했으면 질릴 텐데, 왜 또 자전거 여행을 하느냐고 묻자 "그냥 자전거 탈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여행객도 "페달을 밟으며 바라보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고 자전거 여행 예찬론을 폈다. 아일랜드 여행객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느끼는 속도감과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스릴감은 타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고 오토바이 여행 예찬론을 늘어놓았다. 나는 "오토바이나 자전거는 고장 나면 고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위험하지 않냐"며 안전과 자유롭게 혼자 다니는 데는 배낭여행이 최고라고 말했다.

아마도 자전거 여행은 속도는 느리지만 자전거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즐거움과 시간에 쫓기지 않는 여유가 가져다주는 편안함에 취하게 되는 것 같고, 오토바이 여행은 빠른 속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파노라마식 여행의 쾌감과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오토바이의 기동성이 주는 낭만에 빠져 들게 되는 것 같다. 배낭여행은 어떤 교통수단이든 현지에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걷고 싶으면 걸을 수 있는 등 홀로 다닐 수 있는 자유의 매력이 장점인 것 같다.

처음 만났는데도 생각하는 것이 같아 우리는 그날 아프리카의 밤하늘 아래 의기투합했다. 모두 음악을 좋아하고 아프리카를 사랑하고, 게바라를 그리워하고 넬슨 만델라를 좋아했다. 한결같이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싫어하고, 팔레스타인을 안타까워하고 인종차별을 반대했다.

국적과 나이, 직업, 여행방식, 그리고 여행의 목적지는 다르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자유라는 점에서 같았고 세계를 향한 개방성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걸어서 배낭여행하든, 자전거를 이용하든, 오토바이를 이용하든 우리 네 명이 똑같은 것은 또한 홀로 여행한다는 것이었다.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게 만드는 '여행'

처음 만난 우리 네 사람을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여행을 통해 얻은 세상을 향한 개방성이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기도 하지만, 모든 종류의 편견을 없애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직접 체험을 통해 민족적 편견과 종교적 차별,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민족과 종교, 문화에는 고유의 독창성은 존재할망정 우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행을 하다보면 깨닫게 된다. 세상의 모든 전쟁과 차별은 바로 이런 다양성을 무시하고 세상을 우열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촉발된다.

젊은 시절의 여행경험이 지도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 조지 W 부시는 젊은 시절 뿐 아니라 최고 통치자의 지위에 오를 때까지 자기 나라 이외에는 거의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무솔리니도 병역기피자로 잠시 스위스와 독일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광이 되거나 독재자가 되었다.

김산과 체 게바라,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루스벨트, 간디, 레닌, 호치민, 빌리 브란트는 젊은 시절 여행이든 공부든 망명이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이들은 모두 자유와 독립, 인간해방을 위한 혁명가가 되었다. 세계화의 시대에 한나라의 지도자가 외국 경험이 없다는 것은 결코 자랑일 수 없다.

젊은 시절의 여행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여행을 하지 않는 자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라보는 좁은 시야의 하늘은 편견과 차별을 낳고 전쟁을 불러온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교육심리학 교수인 하워드 가드너는 세계적 지도자와 독재자들의 특징을 비교분석한 <통찰과 포용>이라는 책에서 "진정한 리더는 젊은 시절 해외여행을 통해 견문과 시야를 넓힌다"며 "미래의 독재자들이 대체로 자국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공통된 패턴과는 대조적"이라고 말했다. 하워드 가드너는 나아가 "독재자들이 해외여행을 하지 않는 이유는 색다른 환경을 체험하면 자신이 공들여 세워놓은 계획이 복잡하게 엉키고 갈등을 겪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고 독재자의 성향과 여행의 상관관계를 날카롭게 꼬집어 내고 있다.

독일 통일의 아버지이자 동방정책의 창시자인 빌리 브란트는 "여행하는 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본다"며 "앞을 바라보는 시선은 과거의 유령에 의해서 망쳐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빌리 브란트의 전기를 쓴 독일의 현대사 연구자인 그레고어 쇨겐은 여행을 즐긴 브란트에 대해 "여행하는 사람은 미래를 본다"고 말했다.

지난 1970년 12월 7일 폴란드를 방문한 당시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역사상 가장 잔혹한 히틀러의 나치즘에 대항해 망명을 전전하면서도 단 한 번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브란트가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 진정한 용기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여행을 통해 세상의 양심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 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독일을 벗어나지 않은 편협한 울타리가 빚어낸 히틀러의 인종차별주의 및 배타적 세계관과 스웨덴, 노르웨이, 체코, 스페인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여행을 통해 얻은 브란트의 포용주의와 개방적 세계관의 차이는 역사에서 두 사람을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다른 여행객은 서로를 밀어주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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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출신의 클로드 마살러가 자전거로 세계 여행하는 모습 ⓒ 클로드 마살러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통해 홀로 여행하는 이들 세 명은 험난하다는 수단을 넘어 에티오피아로 왔다. 곤다르는 수단에서 내려오는 가장 가까운 에티오피아 도시이다. 하나같이 수단의 사막이 가장 어려운 코스였다고 입을 모았다. 따가운 햇살에 모래바람이 눈을 가려 가다서다 반복하면서 간신히 수단 사막을 넘어왔다며 곤다르에서 며칠 휴식을 취한 뒤 다음 목적지로 갈 참이다.

이들 세 명은 휴식 차 또는 치료 차 곤다르에 남고 나만 홀로 내일 아침 일찍 배낭을 메고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 아일랜드 오토바이 여행객이 다치지만 않았어도, 그 오토바이 뒤에 타고 함께 여행하고 싶었지만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오토바이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일랜드 젊은이는 일단 탄자니아 잔지바르 섬에 비슷한 시기에 도착할 테니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아일랜드에서 금융 회사에 다닌다는 젊은이는 역시 아일랜드에 있는 여자 친구를 잔지바르에서 만나기로 했단다. 여자 친구의 오빠가 마침 잔지바르에서 사업을 하기 때문에 여자 친구와 그녀의 오빠 등 세 명이 함께 잔지바르에서 만나 여름휴가를 즐기기로 했다는 것. 물론 그는 잔지바르에서의 짧은 휴가 뒤에 홀로 다시 말라위를 거쳐 남아공으로 계속 달려가지만.

약간 취한 기분으로 아일랜드 오토바이 여행객과 숙소로 돌아오는데 서늘한 바람이 맥주로 불게 달아오른 나의 얼굴에 부딪힌다. 그 느낌이 시원한 사이다를 마실 때의 상쾌함 같다. 곤다르는 높은 고지대에 있어 늘 서늘한 바람이 산 밑에서 불어와 사람들의 땀을 씻어내면서 산 위로 올라간다. 기나긴 여행길에서 만나는 다른 여행객은 자유와 해방이라는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여행을 밀어가는 힘으로 작용한다.
#에티오피아 #곤다르 #체 게바라 #오토바이여행 #독재자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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