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에 만들어 놓은 흔적, 남성의 우월감은 이런 일로 확보되지 않는다.강기희
남자의 자존심이나 페미니즘을 거론하는 남성들은 서서 '볼일'을 본다는 의미를 대단한 가치로 본다. 여성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고작 서서 '볼일'을 보는 일이란다.
기자 역시 같은 남성으로 이런 우스꽝스런 우월성은 인정하기 어렵다. 그 주장이라는 게 그야말로 유치하기까지 하다.
남성성의 확보를 서서 '쉬' 하는 데서 찾는 건 유치한 일이다
조선조 왕들은 요즘처럼 소변기가 따로 없었기에 요강을 이용했다. 우리가 어렸을 적 그랬듯 누군가 요강을 받쳐주지 않으면 왕도 무릎 꿇고 이용했을 것이다. 왕이 무릎을 꿇고 '볼일'을 본 일로 왕이 남자의 자존심을 버렸다고 소리쳐야 할 일이던가.
예전 요강을 사용하던 시절 우리의 아버지들도 다 무릎 꿇고 '볼일'을 봤다. 그 일을 가지고 아버지들에게 페미니즘에 일조했다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남성성을 확보하는 일은 그런데서 찾지 말아야 한다. 앉아서 소변 보자는 말을 '유니섹스의 물결에 동참하려는 몰지각한 표현'이라는 말로 치부하기엔 그 논거가 뭔가 부족하다.
서서 '볼일'을 보는 일로 남성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다면 말리고 싶진 않다. 다만 그런 일로 남성성을 확보하려는 논지는 철지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
서서 '볼일' 보는 일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신체 구조상 간편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 하나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
흔히 남성들이 말하는 '서서 쏴' 라던가 '앉아 쏴' 라는 말은 저급한 군사문화가 낳은 우스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우월감으로 포장하기엔 남성들이 너무 초라하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 장교로 임관하는 이들을 교육시킬 땐 좌측 통행이라는 게 없었다. 장교란 모름지기 길의 중앙으로 걸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사병을 비롯해 모든 국민들이 좌측 통행을 공공 질서로 배우고 있을 때 그들은 중앙 통행을 배웠다. 이런 게 조직의 우월성이다. '그들만의 리그'가 여전히 존재하는 대한민국에서나 가능한 문화다.
혹여 아이들에게 남성다움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그것만은 안 된다, 라고 판단했다면 이것 역시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화장실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예의만큼은 가르쳐야 한다. 그것 마저 유기한다면 가정교육이 부실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기자 역시 남자임에 남성성 확보에 관한 생각은 많다. 그러나 서서 '볼일' 보는 일로 남성성을 확보하는 일이나 우월감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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