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호자
어려서 자다 깨어 요강에 무릎을 꿇고 일을 보다가 주변에 오줌을 흘렸다가 혼이 난 기억은 지금의 중년이라면 경험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어느 시대부터 호자가 사라지고 요강이 대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자 하나쯤 있었더라면 그렇게 혼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요강은 여성 중심의 변기이다.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 시인은 요강에 대한 시로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비꼬기도 했다. "네 앞에서는 정숙한 여인도 옷을 벗고, 강직한 선비도 무릎을 꿇는다"라는 촌철살인의 구절에 내심 감탄한 적이 있다.
실상 남성이라는 성적 상징은 프로이트에 의해서 그 의미가 밝혀진 것이 많다. 어려서 '고추'에 대한 콤플렉스가 여성의 성격을 이루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고 배웠다. 어려서 형성된 그러한 남성성 혹은 여성성은 인간 심성의 근저를 이루기도 한다.
또한 프로이트가 배설 행위를 통해서 인간 심리의 근저를 탐색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배설 행위가 단순히 화장실 청소문제로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북경의 나비 한 마리가 뉴욕에 비를 내리게 한다는 나비 효과처럼 표면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 영향력이 어디에까지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앉아서 오줌을 누자는 주장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추측컨대 인류가 지상에 처음 나온 이래 남자는 서서 '쉬'를 해왔을 것이다. 이것이 수만 혹은 수십만 년의 인간의 역사에서 체위에 대한 혁명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어쩌면 지금의 어린 사내애들은 어른이 되면 앉아서 오줌 누는 시대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공중화장실에서도 남자 소변기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올해 충남의 초등학교 교사 임용에서 여교사 비율이 90%를 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 남자 담임교사를 만나기란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런 현상이 점차 중학교로 확대되고 있다. 올해 충남의 국어교사들의 면접시험 대상자(최종 합격자의 130%) 54명 중에서 남자는 5명뿐이었다고 들었다. 이런 현상이 한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게다.
유아시기부터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는 사내애들이 초등학교에서도 여교사의 품안에서 자라는 현실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어려서부터 가치관이 형성되는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성에 의해서 받게 되는 영향이 어떨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조화의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도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조화된 이 사회의 가치 체계에서 그 한 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자도 앉아서 '쉬'하자는 주장은 이런 사회의 흐름에 대한 능동적인 동조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사공은 장강을 떠가면서 용하게도 물길을 찾아간다. 장강이 비록 깊고 거칠어도 바닥의 박힌 돌까지 감추지는 못한다. 사공은 물 표면만 보아도 바닥을 헤아린다. 강기희 기자의 주장에서 나는 유니섹스에서 점차 여성화로 경도되어가는 사회의 흐름을 읽고 있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배려 차원으로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남자답다는 말
지금의 중년들은 어려서부터 '남자다워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자랐다. 그것은 용기, 관용, 의지라는 덕목을 지닌 남자가 되라는 말로도 해석되지 않을까 한다. 초등학교 시절 여자애를 울리면 남자애들은 같은 남자끼리 싸울 때보다 배로 혼났다. 약한 자를 괴롭히면 비겁하다는 것이다.
이제 사내애를 키우면서 용기, 관용, 의지 - 이런 덕목들을 가르치는 일이 드물다. 그저 성적을 올려서 좋은 대학에 가서 일류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부모들의 바람이 되어버렸다. 부모들의 입에서 씩씩하고 용감한 어린이가 되라는 말을 근래 듣지 못했다. 공부 잘 해라 이외에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되짚어 볼 일이다. 그래서인지 중학교 남학생을 가르치다보니 사내애들의 나약해진 모습을 자주 본다.
똑똑하다는 일본 동경대 학생들조차 어머니가 학사까지 관리해주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이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게다. 학부형과 이야기하다 보면 여자애들은 어려서부터 자기 일을 알차게 하는데 사내애들은 영 미덥지 못하다고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
이른바 '마마보이'들 - 자기관리도 못하고 엄마의 지시에 따라 인형처럼 조종당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결혼해서까지 엄마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예도 주변에서 종종 보고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캥거루족'도 여자보다는 남자쪽 이야기일 것이다.
이 기사의 의도야 아내를 사랑하고 배려하자는 취지임을 모르지 않는다. 여자들의 '지청구'를 피해서 앉아서 볼일을 보자는 것이 그런 뜻의 연장선상에 있음도 안다. 그러나 가랑잎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이런 것들이 남성성의 상실을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남자답게'라는 말을 여성에 대한 배척으로 해석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비겁하지 않은 당찬 용기, 관용, 의지, 이런 것들에 대한 덕목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당당히 고추를 내밀고 일을 보는 것조차 사라진다면 이 세계는 그러한 가치의 한 면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여성 시인의 시 한 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남자들만의 향수가 아님을 알 것도 같다.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
싱싱하게 몸부림치는
가물치처럼 온몸을 던져오는
거대한 파도를...
몰래 숨어 해치우는
누우렇고 나약한 잡것들 뿐
눈에 띌까,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 뿐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일 중에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세상에서
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핑계대기 쉬운 말로 산업사회 탓인가.
그들의 빛나는 이빨을 뽑아 내고
그들의 거친 머리칼을 솎아 내고
그들의 발에 제지의 쇠고리를
채워 버린 것은 누구일까.
<중략>
그런데 어찌된 일이야. 요새는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
때묻고 약아빠진 졸개들은 많은데
불꽃을 찾아온 사막을 헤매이며
검은 눈썹을 태우는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멸종 위기네.
- 문정희 시인의 <다시 남자를 위하여> 부분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의 입장에서 보아도 남자애들이 나약해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사소한 일에도 눈물부터 보이는 학생들이 많다. 엄마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남자애들은 자꾸 졸아들고 있다. 하지만 유약해져가는 현대인이나 현실에서 남자들까지 앉아서 오줌 누자는 주장에 대한 문제점은 짚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에는 대체로 그에 합당한 가치가 내재하기 마련이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거나 상조 또는 견제하면서 인류사회를 발전시켜왔다. 그것을 남성성이나 여성성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원불교의 박중빈 대종사가 "여자는 주밀(세밀)하지만 포용력이 부족하고, 남자는 포용력은 있지만 주밀하지 못하다"라는 지적은 종교를 떠나서 음미할 만한 말이다.
요즘 인기있는 드라마에 '주몽'이 있다. 모진 시련 속에서 고조선 회복이라는 대망을 향해 가는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이 감동을 준다. '연개소문' '대조영'이라는 드라마에도 당찬 고구려의 기상으로 가득 넘쳐난다. 이런 드라마가 인기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나약한 현대인과 현실에 대한 반발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드라마 속의 장군들이 앉아서 오줌 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혼이 날 일이다.
학교에서 '볼일'을 보지 못하는 아이들이 꽤나 있다는 말을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들은 일이 있다. 수업 중에 한 아이가 울상을 짓고 있기에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학교에서는 일을 볼 수가 없어 배가 아프다는 것이다. 결국 집에 갔다오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만 적이 있지만 이처럼 어릴 적의 습관은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다.
여전히 이 사회는 '남자다운' 용기와 기백이 필요한 곳이 많다. 그 중의 하나가 군대이다. 여전히 군대는 필요하다. 군대의 민주화를 논하기 전에 입대하는 남자들의 적응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자라온 환경을 보아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고지식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군인들이 앉아서 오줌누는 모습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물론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바뀌었다. 과거 7,80년대 사막에 가서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던 패기도 전처럼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덕목이 지닌 가치까지 내팽겨칠 수는 없다. 여전히 이 사회는 여성적인 세밀함과 부드러움과 함께 남성적인 용기와 패기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여성화로 경도되어가는 현상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자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르는 자아형성 기간에 그렇지 않아도 어느 한 성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어 있는 현실에서 화장실 문화까지 바꾸자는 주장이 내포한 문제점을 헤아려보자는 것이다. 남자들도 앉아서 '쉬'하자는 의견이 단순히 여성을 배려하자는 차원을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이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가치관의 측면에서 그 이면의 의미를 되짚어보자는 것이다. 화장실을 청소하기가 어렵다면 남자들도 참여하도록 하면 될 것 아닌가.
서서 '쉬'한다고 남자다운 덕목이 길러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앉아서 오줌누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사내애들이 엄마의 치마폭에 자꾸 숨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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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이데아의 그림자라면 이데아를 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런 꿈마저 없다면 삶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혁이나 혁신이나 실은 이데아를 찾기 위한 노력의 다른 어휘일 뿐일 것이다. 내가 사는 방식이 교육이고 내 글쓰기가 문화라고 한다면 특히 그런 쪽의 이데아를 찾고 싶다. 물론 내가 찾는 것이 정답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정답보다는 바른답을 찾고 싶다. 이것이 내가 기자가 되고자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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