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 券 풍파(風波)
삼일 째 되는 날은 낮에 퍼붓던 비가 잦아들면서 한밤중인 자시(子時)부터 분주한 움직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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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야심한 시각에 여인의 몸으로 본 보주를 찾아온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구나."
자시 말(末)이었다. 운중각의 문이 열려있었고, 그 안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미 시비들도 모두 잠든 시각이었고 굳이 깨어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찾아오겠다고 은밀히 연락을 해올 때부터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기다리고 있던 터라 시비들을 통해 전달받을 일도 없었다.
@BRI@"그래도 남의 시선은 두려운 모양이군요."
서운한 듯한, 그러면서도 원망하는 듯한 말을 뱉은 사람은 여인이었다. 뜻밖에도 화산파의 매봉검(梅峯劍) 황용(黃蓉)이었다. 자시가 넘은 시각에 운중보주는 왜 찾아온 것일까?
"남의 시선을 의식했다면 여기서 너를 맞이하지도 않았다."
그녀를 맞이한 곳은 사실 운중각에 찾아온 손님이 보주를 만나기 위해 잠시 기다리는 객청 같은 곳이었다. 운중각의 문을 열면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이었다. 사실 이곳은 보주가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왔다가 돌아가는 곳이기도 했다. 보주가 정식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곳은 아니다.
"여전히 냉정하군요. 아니 한 여자의 일생을 짓밟은 사람치고는 너무나 당당하군요."
불은 모두 켜지 않았다. 탁자 위의 황촉만이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시키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불빛만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대가를 치렀다."
매봉검 황용이 매몰차게 몰아붙이는 데도 보주의 얼굴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대가…? 여자의 육체와 마음을 단지 거래라 해서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나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이십육 년간 한 번도 부르거나 찾아오지 않았겠죠."
"네 부친과의 약속이었고, 너 역시 동의한 일이다. 나는 약속을 지켰고, 화산은 누가 뭐라 해도 중원 최고의 문파가 되었다. 더구나 약속을 어긴 것 너였지 내가 아니다."
"사고였어요. 나는 당신 아이를 낳고 싶었어요."
"사고…? 사고가 아니라 네 몸이 뜨거운 탓이었겠지."
황용의 치켜진 눈초리가 더욱 치켜 올라갔다.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 잔인한 사람이다. 탓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이렇게 잔인하게 대할 줄 몰랐다. 어차피 부친의 권유로 인하여, 화산파의 부흥을 위하여 기꺼이 동의했던 일이었지만 그래도 남녀 간의 일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그래도 열흘이란 시간을 한 이불을 덮고, 같은 침상에서 보냈던 사내였다. 비록 첫 사내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중원 제일인이란 광휘에 눈이 멀고 따뜻한 말 한마디에 감격을 했던 때도 있었다.
"당신은 내가 유산(遺産)을 하지 않고 당신 아이를 낳았다 하더라도 당신은 아이만 데려갈 사람이었군요. 지금과 다를 바 하나도 없었을 거예요."
그녀의 표정과 같이 말투 역시 표독스러워졌다.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여자가 한을 품는다는 것이 저런 모습일까?
"피붙이 하나 없는 당신에게는 잊지 못하는 아내를 대신할 여자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만이 필요했겠죠. 아니 자신의 핏줄을 남기려는 이해 못 할 지독한 집착이었겠죠.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표독스럽게 말을 뱉는 황용을 보며 운중보주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하지 않겠다. 그때 필요한 것은 내 아이를 낳아 줄 여자였지 내가 사랑할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솔직한 말이었다. 아내와 자식을 비명에 가게 한 뒤 그가 얻은 것은 중원 제일인이란 휘황찬란한 명예였다. 웅심을 품은 사내라면 가야 할 마지막 권좌였다. 하지만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여자가 필요한 것은 자신의 욕정을 풀 대상이거나 또는 사랑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눈에 아른거리던 아이…. 그 아이를 다시 보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 뻔뻔하기는 해도 위선자는 아니군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위선자라면 정말 슬픈 일이었을 테니까요."
"너는 뻔뻔하지는 않아도 위선자로구나.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것을 사랑했을 뿐이지. 그 가진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황용은 어쩌면 보주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보주는 당시 자신에게 열렬히 구애하던 많은 젊은이들과 비교해 잘생기지도 않았고, 부드러운 마음씨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물론 만나본 적도 없었으니 사랑을 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또한 노류장화(路柳墻花)처럼 팔리듯 그에게 몸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은 부친의 강요와 같은 권유와 화산파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명분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녀 역시 천하 제일인이라는 보이지 않는 보좌에 끌려 승낙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좀 솔직해져 보는 게 어떤가? 이미 다 끝나 세월 속에 묻어버린 이십육 년 전의 일을 끄집어내는 이유가 무엇이지? 더구나 남들 보란 듯이 이 한밤중에 나를 찾아온 이유를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뜻 스치는 보주의 눈에는 미세하게나마 미안한 마음이 엿보였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자신의 욕심으로 젊은 처자 하나를 망쳐놓은 것은 사실이었다. 꿈 많은 소녀를 돈으로 사듯 대가를 주고 안은 것은 사실이었다.
황용은 보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그 이후로 같이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난 세월 속에서 가끔 그런 것을 꿈꾸기도 했다. 이번에 운중보에 들어오면서도 보주가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면 기꺼이 그의 옆에 있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은 아예 접어야 했다.
"당신은 냉혈한일 뿐 아니라 아주 잔인한 사람이군요. 여자는 어리석게도 첫 정을 준 사내를 언제나 그리워하죠. 그리고 자꾸 그 사내의 형상을 자신이 만들어 가는 바보죠. 그 사내의 본래 모습과는 다르게 언제나 자신만의 사내모습을 만들고 그리워하는 거예요."
여자는 그렇다. 본래의 그가 어찌되었든 여자는 그리워하는 사내를 자신의 상상만으로 그리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 사내에게 완전히 버림받을 때까지 말이다.
"좋아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기대할 것도 없겠죠. 어차피 우리의 관계는 거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받아들여야겠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다행이구나…. 나는 이미 이십칠 년 전에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에게 무엇을 바란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아픔은 누구에게나 있다. 황용은 그를 이해하려 했지만 그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저 이제는 그의 말처럼 그를 찾아온 가장 중요한 목적을 말해야 하는 때임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말해 보거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해주겠다."
단지 사랑을 구걸하기 위해 올 여자가 아니다. 이미 마흔 중반에 들어선 중년의 여자가 단순히 옛정을 못 잊어 구구하게 사랑을 구걸하기 위해 이 한밤중에 찾아왔을까? 이미 자신의 마음을 들킨 듯하여 잠시 한숨을 내쉰 황용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장문위를 후계로 지목해 주세요."
결국 후계 문제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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