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21회

등록 2007.01.25 08:22수정 2007.01.25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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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 용추를 치료하다가 느낀 혼원잠(混元潛)의 기운. 그것을 말해주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분실한 잠룡의 혼원잠이 나타났음은 중의의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술잔을 마저 비우고는 말을 돌렸다.

"아니네…, 하여간 추태감은 추교학을 후계로 만들려고 자신이 가장 믿는 신태감을 이곳에 보냈네. 헌데 그가 들어오는 날 끔찍한 죽임을 당했으니 추태감 스스로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겠나? 더구나 돌발적인 상황이 터진다면 자신이 직접 개입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이곳과 매우 가까운 곳에 와 있네."


성곤이 갑자기 고개를 흔들었다.

@BRI@"아니야…, 그렇다면 혈간마저도 운중이 살해하도록 시켰단 말인가?"

"그건 분명 아니네. 혈간을 기습한 자들은 분명 동창의 비영조였네. 아마 추태감의 명령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네. 하지만 말이네…."

"………?"

"억측 같지만 이 모든 상황을 운중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네. 그간 회 내부에서 갈등이 증폭되고 있었고, 그 적절한 시기에 회갑연을 핑계로 후계문제를 거론했던 것이지. 분명 혈간과 추태감이 정면으로 대립할 것을 예상하고 말이야."


중의의 말투는 이미 확신에 찬 것이었다. 그는 지금껏 남들에게 보였던 모습과는 전혀 달리 의외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그 정보가 주는 의미는 너무나 명확했다. 성곤은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오랜 기간동안 보아왔지만 운중의 흉중은 너무 깊어 알 수는 없네. 하지만 운중이 정말 이 일을 꾸민 것이라면 그는 지금껏 진정한 자신을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네. 그는 항상 자신과 자신이 손을 믿는 사람이네. 불확실함을 감수하고 타인의 행동을 예측해 그것을 이용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네."


타인의 행동을 예측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사람이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같이 지내왔지만 서로에 대해 완벽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에게는 언제나 이중적인 면이 있다네. 더구나 인간들에게는 족함을 모르는 끊임없는 탐욕이 잠재되어 있지. 이런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들 말이네. 인간을 속성을 누구보다 더 잘 꿰뚫고 있는 운중의 머릿속에는 추태감뿐 아니라 자네나 나… 그리고 상만천의 행동까지 이미 계산되어 있을 걸세."

"자네는 너무 운중을 계산적이고 믿을 수 없는 친구라 생각하고 있군."

자칫 잘못 들으면 비난으로 들릴 수 있는 성곤의 말이었다. 허나 중의는 그것이 비난이라 해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휴우---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은 내가 말한 두 가지 근거 중 또 하나 때문이기도 하네."

"그렇지…, 또 한 가지 근거가 있다고 했지. 그것이 무엇인가?"

성곤이 매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운중에게 자식이 하나 있는 것 같네."

"뭣…!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성곤이 탄성을 내지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슨 중요한 말이나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가 아예 되지도 않는 말을 들었다는 듯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 순간 성곤의 눈에 잠시 긴장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을 중의는 보지 못했다.

"우리 눈으로 제수씨와 아이의 시체를 확인하지 않았는가? 목이 반쯤 잘린 아이가 다시 살아올 수 있단 말인가?"

그 끔찍한 환영이 떠오르는 듯 성곤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잔영(殘影)은 아직도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자식을 두지 않았던 동정오우 모두가 자신의 자식처럼 생각했던 아이가 아니었던가?

"그 아이가 아니네. 그 아이는 분명히 죽었네."

"그럼 아이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운중이 그 뒤로 홀로 지냈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아는 일이네."

성곤이 아직도 남아있는 잔영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면서 눈을 떴다. 중의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확실하게 밝혀질 것이네. 회 내부에서 수년 전부터 그런 말이 돌았다네. 그저 소문인 것으로 치부했지만 몇 달 전에 그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한 모양이네. 철담이 알아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네."

"자네는 한곳으로만 몰고 가는군. 결국 철담이 그런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운중이 그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이왕 말이 나왔으니 다 털어놓는 게 좋겠군. 운중보를 건축할 당시 운중은 홀로 중원을 떠돌았네. 우리는 처자식을 잃은 슬픔과 이제는 생사대적이 사라졌다는 허탈감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중원 무림인들이 열렬한 지지에 대한 답례인 것으로 이해했지."

"그가 일생을 통해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지낸 일년이었네."

"그때 그는 화산파에 들렀다네. 그리고 장문인의 딸이던 매봉검 황용과 깊은 관계를 맺었지. 황용이 아이를 가졌다네."

"뭐라고…? 그럼 운중이 황용에게서 자식을 얻었다는 말인가? 오늘 황용이 들어왔지 않는가? 그렇다면 대동한 인물 중에 있다는 말인가?"

놀라 다그치는 성곤을 향해 중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황용은 유산을 했네."

중의의 대답에 성곤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

"다행이로군. 아이를 낳았으면 또 죽였을 테니까…."

인간에게 있어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것이 자식이다. 가진 것을 어찌하든 자식에게 주려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무조건적인 욕심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운중에게 후손이 있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영광과 권좌는 그 한 사람으로 끝나야 한다.

작금의 나라 운명도 마찬가지. 똑똑한 황손은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 부(富)를 쌓아놓고 권력을 누리는 자들은 그것을 계속 향유할 수 있다. 허수아비 같은 황제를 앉혀놓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자신들의 뜻대로 욕심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회에서 동정오우에게 강요 아닌 강요를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동정오우 모두 가정을 갖지 않았고, 후손도 두지 못했다. 그리고 회의 그러한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은 것이었다. 유일하게 혈육이 있던 혈간이 자신의 자식도 아닌 조카를 차기 운중보주를 만들기 위해 고집을 피웠던 것만 보더라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후손을 번창하게 만들고 대대손손 부와 권력을 누리게 만들려는 욕심은 거의 동물적인 본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에이……, 쯧…!"

성곤이 영 못마땅하다는 듯 술을 거칠게 따르더니 훌쩍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잔을 채우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운중에게 자식이 있을 것이란 말은 도대체 뭔가?"

"황용에게 그랬듯이 운중은 또 다른 여자를 가까이했을 가능성이 크네. 자네도 알다시피 운중은 자신의 가정과 아이에 대해 유난히 집요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네. 그의 처가 아이를 낳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중원을 떠날 생각을 가졌지 않은가? 회에서 그리도 설득을 하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자신의 처자식을 위해 우리 네 사람마저 외면했지 않는가?"

"운중이 그런 결정을 내비친 것이 과연 그 당시 단지 처자식에 대한 집착 때문만이었을까? 회에 대한 실망은 아니었고…?"

중의는 고개를 흔들며 탄식을 불어냈다. 성곤의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자신 역시 한 때 그런 불만을 가진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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