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진 벽란도에서 마지막 이별
개경팔경 중의 하나인 황교의 저녁노을(黃橋晩照)도 아름답지만 벽란도의 낙조는 가히 일품이다. 서산에 기우는 해가 예성강 물빛을 붉게 물들일 때 벽란정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어스름 저녁노을이 물들일 무렵 벽란도에 임자 없는 거룻배가 매여 있다.
@BRI@죄인을 태우고 유배지로 떠나려는 배다. 사공은 주막에서 탁배기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있을까. 뱃전에 부딪히는 물소리만 철썩 인다. 잠시 후. 우마차에 실려 온 함거가 도착했다. 당대의 석학으로, 조정의 문하시중으로 만백성의 존경을 받던 이색이다. 정도전의 직격탄을 맞은 이색은 또다시 귀양길에 오르는 몸이 되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문하시중이었지만 병권(兵權)없는 재상은 속빈 강정이었다. 성리학의 대가로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등 기라성 같은 문생을 둔 대학자였지만 밀려오는 혁명의 바람 앞에 한 잎 낙엽이었다. 자신이 아끼던 문생의 탄핵을 받고 떠나는 것이 참담했다.
"문하시중각하. 면목이 없습니다. 저희가 죄인입니다."
떠나는 스승을 배웅 나온 이숭인이 울먹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모두가 이 사람의 부덕의 소치이지요."
귀양 가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랴. 이색은 의외로 담담했다.
"가시더래도 몸을 보전하십시오. 기필코 각하를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정몽주가 이색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들의 손과 손 사이에는 함거의 창살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들을 바라보는 백성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정 공(公)만 믿겠소."
정몽주의 손을 굳게 잡으며 이색이 말했다. 풍전등화 같은 고려 사직을 정몽주에게 맡겨두고 떠나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영어의 몸이 된 이색으로서는 믿을 사람은 정몽주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며 결의를 다졌다.
송악산아 잘있거라
거룻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을진 강물 속으로 이색을 실은 거룻배가 빨려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정몽주의 심정은 미어져 내렸다. 벽란도 예성강 물결 위에 배를 띄워놓고 시를 읊으며 뱃놀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존경하는 스승이 유배를 떠난다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공민왕의 피살로 기울기 시작한 고려 사직은 최영의 퇴장으로 해가 떨어졌다. 이색마저 떠남으로써 땅거미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제 어두워지는 허허벌판에 포은(圃隱) 혼자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벽란도 나루터를 빠져나온 거룻배가 예성강 하구를 향하여 흘러내렸다. 거룻배에서 송악산이 점점 멀어져 갔다. 청운의 꿈을 안고 원나라로 공부하러 떠날 때는 다시 보마고 굳게 다짐했던 송악산이건만 이제 가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잘있거라 송악산아. 내 다시 꼭 돌아오마."
시야에서 멀어지는 송악산을 바라보며 다짐해봤지만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일 것 같았다. 송악산을 바라보던 이색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정도전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었을까
이색은 당대의 학자였다. 일찍이 원나라에 유학하여 성리학을 접했다. 원나라의 국립교육기관 국자감에서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귀국하지 않고 원나라의 한림원에 등용되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한국 출신이 미국에 유학하여 미국 정부의 관리가 된 것과 같다.
귀국하여 전리정랑을 필두로 여러 요직을 거치며 문하시중에 올랐다. 심정적으로 원나라를 자신의 제2 조국이나 다름없이 생각했던 관계로 친원파로 기울었으나 미련을 접었다. 천운(天運)이 명나라에 있음을 알고 금릉으로 명나라 천자를 찾아간 인물이다.
이색은 기우는 고려 사직에서 최영이 퇴장한 이후 고려의 대들보였다. 그런데 자신의 문생 정도전의 탄핵을 받고 귀양 가는 몸이 되었다. 이색의 귀양은 이색 개인뿐만이 아니라 고려의 운명과도 직결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정도전과의 일전을 피하지 못함은 왜일까?
권문세족이 과도한 토지를 보유하고 농민을 수탈하는 것은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에 대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불교를 종교적인 기능으로는 이해했지만 왕실과 내통한 일부 사찰이 분에 넘치는 토지를 점유하고 백성을 착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데에 대하여도 견해를 같이했다.
소유하지 않는 것. 즉 무소유(無所有)를 미덕으로 표방하는 불교가 궤(軌)를 벗어났다고 규정하는 것도 생각을 같이했다. 하지만 이성계의 회군에는 반대했다. 여기에서 정도전과 틈이 벌어진 것이다. 왕명을 거역한 회군은 도덕성의 문제라고 봤던 것이다.
정치인은 최소한의 도덕성을 좋아하고 학자는 최대한의 도덕성을 탐구한다
이색은 후대 유학자들에겐 받아들여졌지만 초기 유학자들에겐 도교 사상이라 배척받았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신념이 강했다. 만물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작위하지 않고 스스로 완성한다는 논리에서 이성계의 회군은 용서할 수 없는 역행이었다. 자신의 사고를 도덕성에 묶어둔 결과였다.
정치는 도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에게는 최소한의 도덕성이 요구되지만 학자는 최대한의 도덕성을 탐구한다. 정치인은 도덕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생리를 가지고 있지만 학자는 그러한 정치인을 가두려는 본능을 책무라 여긴다. 여기에서 이색의 괴리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정치라는 물고기는 생태적으로 맑은 물에 살 수 없다. 탁하고 흐린 물을 좋아한다. 학자가 정치판에 뛰어들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해도 현재까지 유효하다.
훗날 정도전이 자신과 태조 이성계를 빗대어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만용을 부리다 목숨을 재촉하는 설화(舌禍)에 휩쓸렸듯이 정도전은 이성계를 움직이는 경세가였지만 이색은 도덕성에 자신과 타인을 가두려는 강직한 학자였다.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은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한다. 상대적으로 잃을 것이 많은 자들은 지키려는 보호본능이 발동한다. 당시 이색은 잃을 것이 없었다. 자신이 가꾸어 온 고결한 학자의 위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이색의 소임은 다 할 수 있었다. 헌데 이색은 수구세력의 바람막이 역할을 했다. 자의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보수 세력에 함몰돼버린 것이다.
역사를 뒤집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상상을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없다. 하지만 위화도에서 회군하도록 윤허해 달라는 이성계의 주청을 최영이 받아들였더라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했을까?
정도전이 주창한 토지개혁을 이색이 과감하게 받아들였더라면 정도전의 혁명 전략을 무력화 시키고 역성혁명 의지를 꺾어 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다. 역사를 뒤집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역사의 교훈이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결과론이지만 정도전은 전략적 정치가였고 이색은 전술적 학자였지 않았을까.
이제 남은 것은 단기필마 정몽주다. 해 떨어진 광야에 홀로 남은 포은(圃隱)이다. 떨어지는 해를 붙잡으려는 정몽주와 세상을 뒤집으려는 혁명세력과의 피 튀기는 한판 대결이 남아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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