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의 고향 영산포를 가다

호남 문화의 젖줄, 영산강 문화권을 찾아서 2

등록 2007.01.27 08:47수정 2007.01.27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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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역사교사모임 장용준 선생님을 따라 앙암(仰巖) 위로 올라보니 굽이쳐 흐르는 영산강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전국에서 모인 역사 교사들의 답사를 축하라도 하듯 눈발이 흩날린다. 앙암 위에서 바라본 영산강은 물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기만 하다.

a 답사지 설명을 하는 전남역사교사모임 장용준 선생님

답사지 설명을 하는 전남역사교사모임 장용준 선생님 ⓒ 전국역사교사모임


@BRI@"저기 두 지역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장용준 선생님이 가리키는 마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배산임수 지형에 형성된 마을과 강이 인접해서 형성된 마을이었다. 우리의 전통 마을은 산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 지형에 형성되는 게 일반적이다. 마을 앞으로 강은 흐르지만 홍수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강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마을이 형성된다.

그런데 영산포 일대 마을은 강에 바로 인접해 있다. 우리의 전통 취락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그 이유를 장용준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a (위) 배산임수 지형에 형성된 전통 마을, (아래) 일본인들에 의해 형성된 강 인접 마을

(위) 배산임수 지형에 형성된 전통 마을, (아래) 일본인들에 의해 형성된 강 인접 마을 ⓒ 전국역사교사모임

"영산포 일대는 원래 사람이 살지 않던 습지였습니다. 그런데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강에 인접한 습지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강이 범람하면 홍수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저 지역에 터를 잡아 살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강에 인접한 지역이 나주평야 일대의 쌀을 실어 일본으로 운반하기 쉬운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개항 이후 일본인에 의해 개발된 영산포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목포가 개항된 후 나주평야와 영산강 일대의 각종 식량과 물자를 기선에 실어 영산포에서 목포까지 수송하기 위해 강이 인접한 영산포 주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a 영산포에 인접해 형성된 마을

영산포에 인접해 형성된 마을 ⓒ 전국역사교사모임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영산포 일대는 적극적으로 개발이 되었다고 한다. 일제가 본격적인 이민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현재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모습도 사실상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나주의 특산물 배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게 1920년대 이후라고 한다. 일본인들이 대거 이민을 시작하면서 배나무를 들여와 심기 시작하면서 생산이 늘어났고, 그 결과 나주를 대표하는 특산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호남 문화의 젖줄로 말도 없이 흘러내린 영산강 줄기에도 아픈 역사의 흔적이 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사방을 둘러싼 산에 익숙한 강원도에 살다가 탁 트인 남녘에 오면 가슴도 따라 트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남녘 땅 강줄기에 새겨진 내력을 알게 되면 애잔한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영산포 일대에는 지금도 일본인들의 흔적이 곳곳에 있습니다."

영산포로 이동한 뒤 설명은 고진아 선생님이 해주었다. 영산포 등대로 알려진 수위측정시설에서 시작해서 영산포 시내를 지나면서 일제 지배의 흔적을 다양하게 볼 수 있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았지만 아직도 이곳에 미련을 버리지 않고 땅문서나 집문서를 고이 보관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a (위 오른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설명하고 있는 고진아 선생님, 동양척식회사 건물, 영산포 거리의 일본식 건축물, 일본인 대지주 고로스미 이타로의 집

(위 오른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설명하고 있는 고진아 선생님, 동양척식회사 건물, 영산포 거리의 일본식 건축물, 일본인 대지주 고로스미 이타로의 집 ⓒ 전국역사교사모임

영산강 일대의 교통의 요지로 성장했던 영산포는 철도가 운행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 이후 강 상류의 댐 건설과 하류의 하구둑 건설로 배의 운항이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영산포 홍어의 유래

쇠락해가는 영산포의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는 게 홍어라고 한다. 홍어의 거리가 있을 정도로 홍어는 영산포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산포가 홍어와 인연을 맺게 된 건 왜구의 침입이 극성을 부리던 고려 공민왕 무렵이라고 한다. 왜구 침입에 대한 대책으로 흑산도 주민을 영산강 하류인 영산포에 강제 이주 시키고 흑산도를 비워두는 공도(空島) 정책을 취했다고 한다.

이때 이주해온 흑산도 주민을 따라 홍어란 음식도 따라 들어오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무렵에는 흑산도에서 뱃길 따라 영산포까지 5일 이상 걸리다보니 그 사이에 홍어가 썩어 지금과 같이 숙성시켜 먹는 홍어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a 홍어의 거리

홍어의 거리 ⓒ 전국역사교사모임


a 영산포 홍어

영산포 홍어 ⓒ 전국역사교사모임

영산강 물길이 막힌 탓일까. 지금은 영산포 홍어도 흑산도보다는 칠레나 아르헨티나에서 들어오는 게 많다고 한다.

a 역사의 숨결을 담고 말없이 흐르는 영산강

역사의 숨결을 담고 말없이 흐르는 영산강 ⓒ 전국역사교사모임

말도 없이 수천 년을 흘러온 영산강 줄기 따라 역사의 숨결과 자취도 함께 흐른다. 전주와 함께 전라도를 대표했던 나주의 영화도, 일제 식민지의 아픈 모습도, 국토 개발 속에 쇠락해가는 나주의 모습도 영산강 물길 따라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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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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