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들은 이미 자취를 감췄지만...

전북 무주군 덕유산 산행을 다녀와서

등록 2007.01.27 13:38수정 2007.01.2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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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디흰 눈이 소복소복 쌓인 풍경이 내 발길을 붙잡았다. 백암봉 송계삼거리로 가는 길에.
희디흰 눈이 소복소복 쌓인 풍경이 내 발길을 붙잡았다. 백암봉 송계삼거리로 가는 길에.김연옥
@BRI@겨울에 내리는 하얀 눈은 팍팍한 일상에서 모처럼 맛볼 수 있는 달콤한 낭만 같은 것. 소복소복 쌓인 희디흰 눈밭을 걷게 되면 괜스레 내 마음이 설레 마치 아름다운 꿈길을 걷는 듯하다.

덕이 많고 너그러운 산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무주 덕유산(德裕山, 1614m). 그저 눈 내린 하얀 풍경이 그리워 나는 지난 25일 덕유산 산행을 떠나는 산악회를 무작정 따라나섰다. 아침 8시에 마산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은 10시 20분께 안성 탐방지원센터(전북 무주군 안성면)에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마침 그 길을 가던 등산객이 우리 일행뿐이라서 그런지 왠지 한가한 느낌이 드는 산길이었다. 이따금 하얗게 눈 덮인 계곡의 녹아내린 얼음 밑으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평화로운 고요가 깃든 포근한 산길을 걸으면 왠지 기분이 좋다. 자연이 주는 편안함 밖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텅 빈 머릿속이 어쩐지 좋다. 말 없는 산이 보기에는 그 고요함을 깨는 사람들이 과연 반가운 손님인지, 미운 불청객인지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평화로운 고요가 깃든 산길을 걸으면 왠지 기분이 좋다.
평화로운 고요가 깃든 산길을 걸으면 왠지 기분이 좋다.김연옥
그런데 나뭇가지마다 하얗게 피어났을 아름다운 눈꽃들은 이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더 일찍 올 걸' 하는 아쉬움만 들었다. 이따금 꽁꽁 얼어붙은 눈길이 불편했지만 하얀 눈길을 실컷 걸을 수 있다는 것 또한 하나의 축복이 아닐까.

긴 나무 계단을 오른 끝에 동엽령(1320m)에 이른 시간은 11시 50분께. 나는 동엽령에서 쉬지 않고 백암봉 송계삼거리를 향해 왼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미끄러운 눈길이 나오다 또 한동안 흙길이 나와 아이젠을 몇 번이나 신었다 벗었다 했다. 그러다 생각지 않은 곳에서 미끄러져 버려 엉덩방아를 두 번이나 찧었다.

차가운 바람에 자꾸 코가 홀짝거려지고 어이없이 두 번 넘어지면서 힘도 빠졌는지 갑자기 허기가 졌다. 낮 1시께에 도착한 백암봉 송계삼거리에서 좀 더 걸어가 혼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그곳에는 먼저 도착한 등산객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아 점심을 하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듯 서 있는 고사목은 마치 고달프고 외로운 우리들 삶을 보는 것 같았다.
흐느적거리는 듯 서 있는 고사목은 마치 고달프고 외로운 우리들 삶을 보는 것 같았다.김연옥

덕유산의 주봉인 향적봉으로 가는 길에.
덕유산의 주봉인 향적봉으로 가는 길에.김연옥
따뜻한 점심을 하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가져서 그런지 힘이 나는 것 같아 서둘러 일어났다. 기다란 나무 계단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중봉(1594m)에 이르게 되고 중봉을 지나 향적봉 대피소로 가는 길에는 주목과 구상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김연옥

살아 천년,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을 바라보면 오랜 세월을 버텨 온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살아 천년,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을 바라보면 오랜 세월을 버텨 온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김연옥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을 바라보면 오랜 세월을 굳건히 버텨 온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런데 나뭇가지가 겨울바람에 흐느적거리는 듯 서 있는 외로운 고사목을 보자 왠지 눈물이 나려 했다. 마치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은, 고달프고 서러운 우리들 삶을 엿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덕유산 향적봉(1614m) 정상.
덕유산 향적봉(1614m) 정상.김연옥
낮 2시 10분께 덕유산의 주봉인 향적봉에 이르렀다. 향적봉 정상에는 많은 등산객들로 붐볐다. 나는 하산 시간 때문에 곧장 백련사(전북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쪽으로 내려갔다. 백련사 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에 눈길이 얼어붙어 몹시 미끄러웠다.

덕유산 향적봉에서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은 눈이 얼어붙어 몹시 미끄러웠다.
덕유산 향적봉에서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은 눈이 얼어붙어 몹시 미끄러웠다.김연옥
백련사의 그림 같은 풍경에 환호성을 지르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며 조심조심 내려가다 보니 백련사 가는 길이 참으로 먼 길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힘들게 1시간 남짓 걸었을까. 이제 백련사 가까이 왔다는 걸 말해주는 백련사 계단(白蓮寺戒壇, 전북기념물 제42호)이 있었다.

계단(戒壇)은 불교의 계(戒) 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백련사 계단은 그 절의 번성기인 통일신라 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화강암질의 암석으로 단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종 모양의 탑을 세워 두었다.

하얀 눈 내린 백련사.
하얀 눈 내린 백련사.김연옥
거기서 10분을 채 못 가 백련사가 보였다. 하얗게 눈이 쌓인 백련사의 그림 같은 풍경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가 초암을 짓고 수도하던 곳에 흰 연꽃이 솟아 나와 세우게 되었다는 백련사(白蓮寺). 구천동(九千洞) 골짜기의 14개 절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 한다.

나는 백련사 경내로 들어서서 이리저리 거닐다 천왕문 아래에 있는 정관당부도(靜觀堂浮屠, 전북유형문화재 제102호) 앞에 섰다. 그것은 조선 중기의 승려인 정관당 일선선사의 사리탑이다. 일선선사는 전북 지역 내의 불교 보급에 큰 영향을 끼친 분으로 서산대사의 제자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광해군 원년(1609년)에 세워진 백련사 정관당부도. 위로 천왕문이 보인다.
조선 광해군 원년(1609년)에 세워진 백련사 정관당부도. 위로 천왕문이 보인다.김연옥
조선 광해군 원년(1609년)에 세운 그 부도탑은 연꽃을 두른 원형의 받침돌 위로 길쭉한 종 모양의 탑신을 올린 간단한 형태이다. 그리고 맨 윗부분을 마치 팽이처럼 뾰족하게 다듬어 마무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백련사 일주문 가까이에 있는 부도밭에는 매월당 설흔 스님의 부도(전북유형문화재 제43호)도 있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금오신화>를 지었던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로 알려지기도 했던 것으로 전체적으로 연꽃 장식 외에는 별다른 꾸밈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나는 일주문을 지나 눈이 쌓인 하얀 길을 걸어갔다. 예쁜 경치에 흠뻑 빠지며 한가한 걸음으로 가야 하는데 백련사에 오래 머물러 시간이 꽤 늦었다. 할 수 없이 종종걸음을 치다 아차 하는 순간 쿵 하고 또 미끄러져 버렸다.

비록 눈꽃 산행은 못했지만 마산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마음이 가벼웠다. 무엇보다 한동안 팍팍한 일상을 버텨 나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어 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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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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