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산행을 꿈꾸다 복병, 눈을 만나다

<포토 에세이>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이 되지 않기를

등록 2007.01.27 19:26수정 2007.01.27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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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산 설경 ⓒ 안준철

어제(26일) 겨울 산에 다녀왔습니다. 눈을 기대하고 산을 올랐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겨울 산의 황량함 속에 잠시 몸을 맡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고독할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고독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입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면, 아니 그 쓸쓸함을 견딜만하다면 우리네 삶이 조금은 덜 구차해질지도 모릅니다. 이런저런 일로 삶이 쓸쓸할 때 그냥 쓸쓸해버리면 될 테니 말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세상의 평판 같은 것에 초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소한 일로 곧잘 마음을 다칩니다. 때로는 그것이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황지우 시인이 말했던가요?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은 나를 알아달라는 거다.’

그런 비슷한 말(혹은 시구)이었는데, 참 솔직한 사람이다 싶었습니다. 시에 대한 모독이라고 버럭 화를 낼 사람도 있겠지만, 제 자신도 아니라고 말 못할 것 같습니다.

a 산죽

산죽 ⓒ 안준철

요즘은 외롭지 않아 고민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야 전업 시인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외로움을 파먹고 사는 시인이 외롭지 않으니 큰일이지요. 가끔은 외롭고 싶어서 산을 오를 때가 있습니다. 외로움을 위한 산행이라면 좀처럼 눈을 만나기 어려운 남도의 겨울 산이 제격입니다.

짙푸른 녹음이 우거진 여름 산이나 형형색색의 고운 단풍이 눈에 밟히는 가을 산에서는 여행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지요. 흰 눈이 쌓여 은세계를 이룬 겨울 산의 눈부심도 외로움을 방해하기는 마찬가지겠지요.


그런 연유로 해서, 저는 일기예보를 통해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눈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계산 중턱에 오르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허공 어디쯤에서 실밥 같기도 하고 검불 같기도 한 것이 날아와 제 손등에 내려앉았습니다. 차가운 감촉을 느끼고서야 그것이 눈인 줄 알았습니다. 눈이 제법 내리기 시작한 것은 산 능선을 지나 비탈을 타고 계곡 쪽으로 내려갈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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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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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철

산중에 있는 보리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니 눈은 그쳐 있었지만 이미 눈길이 닿는 곳까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눈사태가 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문득 ‘초벌구이’라는 말이 머리를 스친 것도 눈이 아주 많이 내리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명으로 만든 소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황홀하지는 않지만 고운 자태가 느껴지는 그런 소박한 아름다움 말입니다.


저는 ‘소박’이란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물론 소박한 사람도 좋아합니다. 세상에는 빼어난 재주나 기술을 가진 사람도 필요하지만 그들이 이루어놓은 것들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고 즐거워할 줄 아는 보통사람들도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감식하는 눈높이가 너무 높은 것도 꼭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저는 미감의 눈높이가 높지 않아서인지 산죽(山竹)이나 쓰러진 나무 등걸 위에 쌀가루처럼 내려앉은 흰눈을 보면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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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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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철

지리산 환경지킴이로 일한 적이 있는 아는 이에게 들은 말입니다. 너무 예쁜 꽃을 보면 사진을 찍고 난 뒤에 그 꽃을 없애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요. 갈수록 고사목이 줄어드는 것도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나무를 잘라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도 지나치면 인간의 추악한 욕망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나 봅니다.

저도 눈을 쌀가루로 비유했는데, 지금처럼 우리가 좀 더 풍족한 삶을 살았다면 그런 비유가 사용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목화솜 같은 눈’도 그것이 단지 형태의 유사성만으로 비유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의 춥고 배고픈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진 비유일 가능성이 크지요. 이렇듯이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방식 속에도 삶의 애환이 담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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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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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철

저는 나잇살을 먹었어도 눈을 퍽 좋아합니다. 요즘은 사진 찍는 재미에 빠져서 눈이 오면 예쁜 설경을 몇 컷 담아가고 싶은 욕심을 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욕심을 품다가도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내 행복이 남의 불행이 될까 염려스러운 것이지요.

어제 저는 외로운 산행을 꿈꾸었다가 눈이 오는 바람에 그만 행복하고 말았습니다. 산행의 목적 달성은 못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니, 더없이 행복합니다. 다만, 내 행복이 남의 불행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올 한해 내내 그런 바람을 가지고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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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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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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