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왜 보수에게 패배하는가?"

[서평]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등록 2007.01.29 13:33수정 2007.01.3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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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8백만 명 시대. IMF 이후 급속하게 확대되고 있는 소득차이는 대한민국을 80대 20의 사회에서, 다시 90대 10의 사회로 몰아넣고 있다. 수도권 어디 어디의 땅값이 하루 사이에 얼마가 뛰었다는 신문기사 옆에는, 또 누구누구가 사채 빚에 카드 캉에 목숨을 버렸다는 기사가 나온다.

숨이 턱턱 막히는 등록금을 겨우 감당해 내고 사회에 나와도 일자리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 버렸고, 설령 취직을 한다 해도 쥐어지는 월급으로는 꿈에 그리는 삶을 영유할 수 없다.


그렇다. 이제 한국사회 계급모순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양극화를 만들어 놓은 '가진 자'들은 '없는 자'들이 혁명적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는 희망을 가질 수 없게 함으로써, 마르크스가 예언한 대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 이제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 빈민들은 들고 일어날 것이다!

어라?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혁명의 편에 서야할 노동계급은 누구나 다 아는 대표적 자본가 정당에게 표를 던진다. 노동자들을 위한다는 정당은 경제적 수준이 중산층 이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도 겨우 5%를 조금 넘기는 지지율만을 얻고 있다. 그 정당은 오히려 그나마 '먹고 살만한' 화이트칼라 직업층에서 지지율이 가장 높다.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서민들의 삶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가? 아니, 왜 자신의 이익과 반대되는 정당에 투표하는가?

진보세력의 '신화', 보수세력의 '문화적 내전'

a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겉그림.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겉그림. ⓒ 삼인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우화적인 제목의 책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조지 레이코프는 이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과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을 탐색함으로써 언어의 성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지언어학'을 창시한 학자로 우리에게 잘알려진 촘스키의 제자이자 학문적 라이벌이다.

레이코프는 자신의 학문적 연구결과를 현실정치에 적극 적용하여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과 활동가들에게 보수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이기는 법을 강의해 왔다. 이 책은 그의 강연을 모아 출판한 것으로,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민주당 내에서 "거의 마오쩌둥 어록에 비견될 만큼" 널리 읽혔다.


이 책에서 레이코프는 빈민들이 부자정당에 투표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부자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격 없는' 빈민들이 계속 빈민으로 남아서 '자격 있는' 부자들을 부양해야만 한다. 즉 부자는 빈민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부자들의 이익을 지켜줄 보수주의자들이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소득층의 지지가 필요하다. 상당수 저소득층과 중산층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여 투표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보수주의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소득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진보주의자들과 '문화적 내전'을 벌인다. 그들이 이 내전에 동원하는 것은 '이해관계'가 아닌 보수적 '가치'와 '정체성'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진보세력이 가진 하나의 '신화'는 거짓이 된다. 그것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존재이므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만 하면 그들은 옳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신화다. 진보주의자들은 "자기 이익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진실'을 전달하면 보수는 패배하고 진보는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즉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2000년 대선에서 고어는 부시의 감세안이 상위 1%에게만 혜택을 준다고 강조하면 99%의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따라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가난한 보수주의자들은 고어를 버리고 부시를 선택했다. 그들은 "부자들(곧 선한 사람들)이 잘 훈육되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많은 돈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프레임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또,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레이코프는 '프레임(frame)'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 행동의 좋고 나쁜 결과를 결정한다. 곧, "프레임을 바꾸는 것은 이 모두를 바꾸는 것"이고,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것, 다시 말해 대중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바로 "사회적 변화"가 된다.

이 책의 제목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레이코프가 프레임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은유다. 그는 '인지과학 입문'이라는 수업에서 프레임 이론을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한 가지 과제를 준다. 그것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코끼리(코끼리는 미국에서 공화당을 상징하는 동물이다)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 과제에 성공할 수 없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고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프레임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프레임을 떠올려야 한다.

@BRI@예전에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곤혹을 치루고 있을 때, TV에서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라고 한 순간 모두가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일화는 "상대편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려면 상대편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프레임의 원칙"을 가르쳐 준다. 그렇다면 상대의 프레임에 대응할 방법은? 없다. 단지 우리의 시각에서 프레임을 재구성 하는 방법뿐이다.

레이코프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프레임'의 중요성에 대해 일찍부터 깨달아 왔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1970년 루이스 파월이 대학 안팎에 보수주의 이념의 확산을 위한 연구소들을 세울 것을 제안한 이후, 재벌들을 설득하여 해리티지 재단, 올린 기금 교수직, 하버드 올린 연구소 등을 세웠다. 이들은 진보세력에 비해 4배나 많은 예산을 보수주의 지식생산에 쏟아 부으며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로버 노키스트라는 우익인사는 매주 수요일 각계의 우익 지도자 80여 명과 함께 단체로 만나 서로 논쟁하며 의견을 조율한다. 이번에 누가 양보하면 다음에는 또 다른 누가 양보하는 식으로 타협을 통해 보수주의자들의 행동통일을 이루어낸다. 또한, 우익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프랭크 룬츠라는 사람은 보수주의자들만을 위한 언어 사용 지침을 집필하여 모든 보수주의 후보, 변호사, 판사, 그 외 대중 앞에서 발언하는 인사들을 위한 교육 지침서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엄청난 자금을 바탕으로 능력 있는 젊은 연구자들을 지원하고 이들 사이에 평생 지속되는 인맥을 형성시킨다. 진보적인 재단들이 과중한 업무와 낮은 급료에 허덕이면서 대중과 어떻게 연결될지 고민할 시간과 에너지를 갖지 못하는 동안 보수 세력들은 인프라를 건설하고, 미디어를 접수하여 보수적 가치의 재생산을 노린다.

보수주의자들은 알고, 진보주의자들은 모르는 것들

레이코프의 이야기들은 철저히 미국적 상황만을 고려하여 제시된 것들이고, 미국의 진보와 보수가 한국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지만, 그가 제안하는 프레임 전략은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준다. 그가 요약한 11가지 실천 지침은 새로운 대안의제를 국민들의 힘으로 실현하려는 진보세력들이 반드시 구현해야 하는 것들이다. 물론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라기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으되 실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들'에 가깝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관료주의적 언어를 버리고 우리의 도덕적 관점에 입각하여 말할 것', '개별 쟁점을 넘어 전략적으로 사고할 것', '공통된 진보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단결하고 협력할 것', '부동층 유권자들에게 우리의 모델을 작동하기 위해서는 진보주의적 지지자들을 향해 발언할 것, 오른편으로 이동하지 말 것' 등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하나마나한 이야기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의 이론을 우리의 실제 경험에 대입해 보면 오히려 우리의 행동 자체가 '비상식적', 아니 '몰상식적'이었던 경우가 많으니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레이코프의 연설문이나 칼럼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중복되는 내용들이 많다. 총 2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 중에서 레이코프의 핵심 주장은 60페이지에 불과한 머리말에 다 들어 있다. 나머지는 머리말을 구체적 사례에 적용해 부연 설명한 것이거나 강연에서의 질문에 대한 답을 단 것 정도이다. 그러나 현재 '위기'에 처한 진보세력의 의제 형성과 확산 능력을 볼 때, 정독할 가치는 충분하다.

한국의 보수도 이미 '담론경쟁'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미국의 리더십연구소나 일본의 마쓰시다 정경숙과 같은 보수주의 싱크탱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진보와 싸워 이기고 우익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진보세력도 레이코프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여 '프레임 전략'에 대한 연구에 착수할 필요가 있다. 공공연한 연구로 인해 우리의 프레임 전략이 보수세력에게 노출될 것을 우려할 필요는 없다. 레이코프가 말한 것처럼 이 모든 것은 "진보주의자들은 모르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이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2004년 출판된 이 책의 추천사에서 미국 민주당 하워드 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미국 민주당원들이 조지 레이코프의 책을 몇 년 전에만 읽었어도, 오늘날과 같은 꼬락서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백악관에서도, 의회에서도, 법원에서도 밀려났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 후 레이코프의 책을 읽은 민주당은 지난 중간 선거에서 대승했다. 비슷한 입장의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진보적 생활인이 만드는 정책마당 '이스트 플랫폼(eplatform.or.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진보적 생활인이 만드는 정책마당 '이스트 플랫폼(eplatform.or.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교보 특별판)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와이즈베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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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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