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무죄 밝힐 사람 나 밖에 없었어요"

무죄로 판결난 인혁당 사건 32년 이겨낸 김진생·이영교

등록 2007.01.30 16:35수정 2007.01.3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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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희 기자] "지난 32년 동안 얼마나 무서워하며 살았는지 몰라요.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 때문에 어린 아이들은 돌팔매질을 당하고, 저는 번번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남편의 죄를 인정한다'는 각서 쓰기를 강요받고….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어요. 남편의 무죄를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니까요."

a 남편과 함께 32년 간 ‘사법 살인’당했던 김진생·이영교씨(왼쪽부터).

남편과 함께 32년 간 ‘사법 살인’당했던 김진생·이영교씨(왼쪽부터). ⓒ 여성신문 정대웅기자

지난 23일 서울중앙지법이 남편의 무죄를 선고했을 때 이영교(72·대구 동구 방촌동)씨와 김진생(78·대구 중구 대봉동)씨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어쩌지 못했다.

이씨의 남편 하재완(당시 43세·양조장 경영)씨와 김씨의 남편 송상진(당시 46세·양봉업)씨가 지난 1975년 4월9일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꼭 32년 만이었다. 이들이 남편과 함께 '사법살인'을 당하고 '살아도 죽은 목숨'으로 산 지도 32년이 된 것이다.

이씨와 김씨가 '빨갱이 아내'로 살면서 의지할 것은 오직 오기뿐이었다. 그러나 이 오기를 넘어선 것은 아이들을 길러내고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는 여성가장으로서의 절박감과 책임감이었다.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었던 동네 사람들의 멸시에 찬 곁눈질과 손가락질도, 365일 문을 열고 살아도 도둑 걱정을 안했을 만큼 집앞을 지키고 선 경찰도 20년 세월이 흐르니 이력이 붙어버렸다. 남편은 무죄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남편이 국가 전복을 위해 간첩활동을 한 빨갱이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TV에서 연신 그 얘기를 하니까 나중엔 내가 남편한테 속았나 싶은 생각까지 들더라구요. 하지만 인혁당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 갈수록 남편에 대한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지요."

이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사형 집행 다음날부터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날조한 조작극이라며 진실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 과정에서 3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금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문정현 신부, 김형태 변호사 등과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에 들어서기 전까지 인혁당 사건의 진실은 암울한 시대상황 아래 묻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데모를 하고, 유가족들과 모임을 갖고, 고문·조작사건임을 밝히기 위해 당시 재판 기록을 입수하러 다니는 등 서울과 대구를 오가는 고된 삶이 시작됐다. 매일같이 집을 비우는 엄마 때문에 아이들은 고아 아닌 고아로 자라야 했다.


이런 정성이 통했는지 20여년이 지난 1998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2000년 12월 국회의사당 앞에서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천막농성에 들어가는 등 함께 하는 목소리가 점차 많아졌다. 급기야 지난 2005년 12월 가해자였던 국가정보원(옛 중앙정보부)이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은 조작사건"이라고 발표했고, 지난 23일 재심에서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김씨는 "여전히 진상규명이 되지 못한 채 울음을 삭이며 살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이 앞선다"며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법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으니 역사의 진실을 모두 다 밝혀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이들은 최근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히고 있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당대표에 대해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최소한 아버지의 죄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유신정권 시절의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꼽힌다.

당시 박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주동자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지하조직인 인혁당을 만들어 공산혁명을 기도했다며 23명을 구속했다. 이중 주동자로 꼽힌 하재완·송상정·도예종·서도원·김용원·여정남·우홍선·이수병 등 8명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지 17시간 만에 처형당해 국제사회로부터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23일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8명에게 "피고인들에 대한 고문·협박 등이 인정된다"며 사건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이영교·김진생씨를 포함한 인혁당 유가족 46명은 지난해 11월 국가를 상대로 34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며, 사형이 집행된 8명 외에 징역형을 선고받은 20여명과 민청학력 관련자 200여명도 조만간 재심을 청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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