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잔인한 죽음과 장인들의 혼이 있었다

[생뚱맞은 과학선생의 실크로드 여행 ⑤] 서안, 진시황제의 병마용 박물관

등록 2007.02.01 07:10수정 2007.02.01 10:26
0
원고료로 응원
a

진시황제의 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 폭이 62m, 동서로 길이가 230m에 이르는 1호갱의 지하군대는 돔형 건물로 덮여있다. ⓒ 조수영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 즉 테라코타를 말한다. 진시황제는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기 위해 병마용들을 만들었다. 진시황릉의 순장품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시황제의 무덤 속이 아니라 진시황릉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있다.

2천 년 동안 역사에 묻혀 있었던 병마용들

병마용들은 2천 년을 지하에 묻혀 있다가 1974년 양지발이라는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비록 그때 정부로부터 받는 상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 병마용 박물관 안에서 클린턴과 찍은 사진을 뒤에 걸어놓고 사인을 해주며 돈을 벌고 있었다.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다. 8천여 개의 실물 크기 도용(陶俑)과 수백 필의 도마(陶馬), 1백 여승의 나무전차, 그리고 대량의 청동병기가 발굴되었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지금은 그러한 제한이 풀려서 카메라뿐만이 아니라 캠코더까지 촬영할 수 있어졌다.

a

[왼쪽 사진] 360도 원형극장에서는 당시 병마용의 제작과정을 보여 준다. [오른쪽 사진] 1호갱의 입구. 반원형의 돔으로 싸여있다. ⓒ 조수영

여행 2일(8월 4일), 서안의 여름은 무더웠다. 40도가 족히 넘는 기온에 높은 습도 때문에 사우나가 따로 없었다.

용갱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원형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기로 했다. 영화 내용도 중요하고, 우선 더위를 좀 식히고자 하는 맘에서다. 360도 원형 스크린에 펼쳐진 장면들은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부터 병마용의 제작과정, 항우의 군대가 용갱을 불태우는 장면, 그 후 농부가 용갱을 발견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a

제국전역에서 온 군사들이 서로 출신지가 다르다는 것은 저마다 다른 얼굴과 머리모양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생생한 표정은 실제 병사를 본뜬 것이라 생각될 정도이다. ⓒ 조수영

6천여 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1호갱

@BRI@2천 년 전의 용병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을 안고 1호갱으로 들어섰다. 폭이 62m, 동서로 길이가 230m나 되는 지하군대는 돔형 건물로 덮여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실제 사람 크기의 도용들이 방대한 군영을 이루고 서 있는 모습에 압도당했다. 6천여 명의 보병과 전차와 말이 전시관의 뒤쪽까지 전투 대형으로 늘어서 있다. 대부분 동쪽을 향해 서 있으나 제일 왼쪽에 있는 한 줄의 군사들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쪽은 산이므로 한 줄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도용들은 그 모습이 너무 생생해서 개개의 실제 병사를 그대로 본뜬 것이라 생각될 정도다. 또 큰 대열을 이루고 있으나 그 각각의 모습은 조금씩 달랐다.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실물보다 약간 더 큰 병사는 제국 전역에서 차출한 여러 민족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a

[위 사진] 견장을 단 장교는 그 표정에서 지휘관의 위엄이 느껴진다. [아랫사진] 생생한 표정이 실제 병사를 본뜬 것이라 생각될 정도이다. ⓒ 조수영

무기도 다양하다. 도용들은 손에 쇠뇌와 화살을 들고 있는 것, 긴 창을 들고 서 있는 것, 등에 화살집을 메고 있는 것도 있다. 발굴 당시에 화살집 안에는 청동화살이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발굴된 쇠뇌, 화살촉, 창, 칼은 2천 년이 넘도록 부식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조사 결과 주석, 구리, 니켈과 같은 성분들을 13가지나 섞은 합금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진시황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금한 청동검은 발굴 당시까지 종이뭉치를 단번에 잘라낼 수 있을 만큼 날이 정교했다고 한다.

a

[위 사진] 진시황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금한 청동검은 2천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으면서도 종이뭉치를 단번에 잘라낼 수 있을 만큼 날이 정교했다고 한다. [아랫사진] 구리로 만든 극(戟). 진나라 시대의 무기로 한쪽에 “3년상방 여불위 조사공구”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2호갱에 전시되어 있으며 “여불위가 승상이 되고나서 3년째 만들어졌다”는 뜻으로 병마용갱이 진시황의 부장품임이 증명되었다. ⓒ 조수영

용갱은 몸과 머리를 따로 만들어 구웠다. 각각의 발바닥에는 이를 만든 장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지금은 황갈색의 테라코타색이지만 원래는 모두 다 실물과 똑같이 채색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발굴 당시에만 해도 남아있던 색깔들은 출토 후 공기와 햇빛에 노출되면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발굴 당시 찍은 사진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a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궁노병은 앞코가 네모진 신발을 신고 있다. 오른쪽 신발의 밑창에는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한 장식용 못이 박혀있다. ⓒ 조수영

진시황제는 실물 크기 용병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보며 사후세계에서 다시 이들이 적의 침략을 막아줄 것 같은 힘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장인들은 가족과 떨어져 작업에 참여하였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모두 처형되었다. 이곳은 잔인한 죽음의 현장이고 장인들의 혼이 묻힌 곳이기도 한 것이다.

항우의 군대에 의해 파괴된 병마용갱

병마용은 다른 무덤들처럼 도굴꾼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나라 항우의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항우의 군사들은 갱을 파고 들어와 병사들이 쥐고 있던 병기와 전차를 모두 빼앗아 갔고, 병사와 말들도 마구 부수고 불을 질렀다.

1호갱 중반 부분에는 아직도 복원이 완성되지 않은 깨진 용갱들이 황토에 묻혀 있었다. 병마용에서는 아직도 대대적이고도 정밀한 발굴과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발굴과 복원 작업을 할 때는 관광객이 없는 시간에 문을 닫아 놓고 두 시간씩 한다고 한다.

a

1호갱 중간 부분의 모습. 병마용에서는 아직도 발굴과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 조수영

궁노병과 전차부대인 2호갱

2호갱은 1호갱 전시관의 기초공사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두 용갱이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했지만 각각 분리된 형태임이 증명되었다.

2호 용갱은 L자의 형태로 길이 96m, 너비는 84m, 깊이는 5m로 면적은 1호갱의 절반 수준이다. 발굴도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발굴하지 못한, 비닐로 덮어놓은 부분의 병마용에는 색이 조금 남아 있다고 한다.

퇴색을 우려해서인지 조명도 어두워 약간 으스스한 느낌도 든다. 갑자기 병마용 들이 그때 죽은 장인의 혼령같이 느껴져 섬뜩했다.

보병이 대부분인 1호갱과 달리 2호갱은 궁노병, 경차병, 차병, 기병 등 네 부분의 서로 다른 병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관의 가장자리에는 대체로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병마용을 유리관에 넣어 따로 전시하고 있었다.

a

2호갱은 L자의 형태로 궁노병, 경차병, 차병, 기병 등 네 부분의 병과로 이루어져 있다. 퇴색을 우려해서인지 조명이 어두워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 조수영

지휘부의 군영인 3호갱

3호갱은 1호갱에서 25m 떨어진 지점에서 발굴되었다. 凹모양으로 면적은 겨우 300㎡지만 68명의 지휘관이 있는 지휘부의 군영이었다. 용병들의 배열과 말의 배치, 무엇보다도 전쟁 전에 점을 치는 사슴뿔의 조각이 발굴됨에 따라 이곳이 고대 군진의 지휘부라는 것이 밝혀졌다. 장군용들은 머리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조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a

3호갱은 凹모양으로 면적은 작지만 지휘부의 군영이었다. 장군들의 용갱은 심하게 부서지고 대부분 머리부분이 없었다. ⓒ 조수영

장군용들은 벽돌을 깔고 그 위에 서 있었다. 손 모양은 뭔가 쥐고 있는 모양이지만, 손에 든 것은 없었다. 군사토론을 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발견된 3개의 갱 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더 많은 병마용갱이 묻혀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주변에서 진시황제 사망 당시에 미처 완성되지 않아 내부는 비어 있는 4호갱을 발굴했다고 한다.

진시황제의 영혼이 타는 동거마

병마용 박물관에는 발굴된 두 대의 대형 채색 동거마를 전시하고 있었다. 동마차는 진시황릉 서쪽 200미터 지점에서 발굴되었는데, 1, 2호 두 대의 마차는 발굴 당시 완전히 깨진 상태였다. 2천여 개에 달하는 조각들을 1980년부터 8년간에 걸쳐 복원하였다고 한다.

a

[위 사진] 동거마 1호차. 마부와 탑승자가 모두 서는 형태이다. 동마의 얼굴을 살펴보면 크게 뜬 눈은 정면을 향하고, 약간 들창코인 콧구멍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있는 듯하다. [아랫사진] 동거마 2호차. 마부는 앞에 앉아 있고 탑승자는 실내에 앉아 있도록 되어 있다. 진시황제의 영혼이 타는 것이다. ⓒ 조수영

1호차는 길 안내용으로 네 마리의 말이 끌고 있다. 햇빛을 가릴 수 있도록 우산이 꽂혀져 있는데 해변의 파라솔 모양이다. 우산은 해가 이동함에 따라 조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2호차가 진시황의 영혼이 타고 다닌다는 것인데, 1호차와 마찬가지로 네 마리의 말이 끌고, 마부 한 사람이 말을 이끌고, 진시황은 가마처럼 생긴 장막 안에 탄다. 바깥 장막을 두 겹으로 하고, 그 사이에 뜨거운 물이 흐르게 하여 난방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동마차, 동마, 마부 도용의 크기는 실물의 절반 정도였다. 두 대의 동거마 모두 장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으며 장식이 무척 화려하고 정교했다. 기원전 3세기에 이런 기술이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옆 진열실에는 또한 세계 각국의 정상급 인사들이 다녀가면서 선물한 기념품도 전시하고 있었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여 남기고 간 봉황무늬 도자기 항아리도 있었다.

과거 실크로드의 거점도시 천수로 이동

빡빡했던 서안의 일정이 끝났다. 다음 도시인 천수로 이동하기 위해 서안역으로 이동한다. 서안역은 서안성벽과 마주하고 있었다. 검표원을 지나니 공항의 보안검사대 같은 시설에서 짐을 검사한다.

a

[위 사진] 역으로 들어가려면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아랫사진] 발 디딜 틈 없는 서안역 대합실. ⓒ 조수영

역 안은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평일인데도 마치 우리나라의 명절 무렵 서울역 대합실 같다. 기차가 들어온다는 표시등이 들어오자 대합실에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플랫폼으로 몰려든다. 통로가 좁은데다 저마다 큰 짐들을 끌고 가기 때문에 북새통이다.

사람들의 물결에 떠밀려 기차에 올랐다. 가까스로 자리에 앉았지만 화장실이라도 가려니 앞으로 지나갈 수 없다. 입석 승객이 좌석 승객의 수를 넘는 듯했고, 짐이 통로를 꽉 막고 있어 갇힌 신세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 * 쇠뇌- 여러 개의 화살이 연달아 발사되며, 활보다 멀리 쏠 수 있는 장거리 공격용 무기. 전국시대부터 쓰였는데 '무려 600걸음 밖을 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쇠뇌의 촉은 아주 크고 청동으로 만들어져 살상력이 강했다. '그 소리와 위세가 마치 사람이 성을 내는 것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덧붙이는 글 * 쇠뇌- 여러 개의 화살이 연달아 발사되며, 활보다 멀리 쏠 수 있는 장거리 공격용 무기. 전국시대부터 쓰였는데 '무려 600걸음 밖을 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쇠뇌의 촉은 아주 크고 청동으로 만들어져 살상력이 강했다. '그 소리와 위세가 마치 사람이 성을 내는 것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윤석열 대통령 태도가...' KBS와 MBC의 엇갈린 평가
  2. 2 5년 뒤에도 포스코가 한국에 있을까?
  3. 3 윤 대통령 95분에서 확인된 네 가지, 이건 비극이다
  4. 4 감정위원 가슴 벌벌 떨게 만든 전설의 고문서
  5. 5 6자로 요약되는 윤 대통령 기자회견... 이 노래 들려주고 싶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