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시간이 시시각각 밀려오는 것을 알 길이 없는 공양왕은 찻잔속의 태성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창릉을 개축하고 해온정을 새로 지었다. 신년 하례를 위하여 세자 석(奭)을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보냈다. 황제를 조현(朝見)하고 눈도장을 받기 위해서다.
1392년 초하루. 임신년 새해가 밝았다. 수창궁에서 공양왕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있는 금릉(남경)을 향하여 하례를 올리고 연회를 베풀었다. 임금이 베푸는 연회에 참석한 신료들은 마음이 불편했다. 혁명세력과 수구세력이 서로를 감시하고 염탐하는 자리라 긴장감이 감돌았다.
덕을 잃은 왕조는 백성이 폐하여도 된다
@BRI@세자가 돌아오는 날. 공양왕은 이성계로 하여금 세자를 마중 나가도록 명했다. 퇴궐한 이성계는 방원을 사저로 불러들였다. 방원의 정보력과 순발력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모든 일을 상의하는 입장이었다. 이성계에게 있어서 방원은 아들이라기보다 혁명으로 가는 길의 둘도 없는 동지였다.
"왕이 날더러 세자를 영접하라 명하시니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공양왕과 정몽주 사이에 비밀한 일이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부자지간에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는 왕도 정몽주도 존칭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 정몽주는 문하시중, 이성계는 수 문하시중이었다. 현대적인 의미로 풀이하면 정몽주는 총리였고 이성계는 부총리였다.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느냐?"
"해괴한 첩보를 접수하였습니다만 아직 속내를 정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 거미줄처럼 쳐놓은 방원의 첩보망에 뭔가 포착되었지만 핵심을 분석하지 못한 상태였다. 왕실 보호세력은 얼마 전 궁정연회에서 이성계를 도모하려는 계획이 누설되어 수포로 돌아간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보안 유지를 단단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염려하지 마라."
"아버님께서 개경을 비우지 않는 것이 타당한 줄로 사료되옵니다."
"됐다. 아버지가 고려의 군권을 틀어쥐고 있는데 누가 감히 도전해 오겠느냐. 세자도 영접하고 막간을 이용하여 사냥도 즐기면서 심신을 좀 쉬려 한다."
"그래도 아버님께서 개경을 비우시는 것은 위태롭습니다."
"개경에는 네가 있지 않느냐. 너만 믿고 다녀오마."
이성계는 자만하고 있었다. 고려 5군을 3군으로 재편하여 도총제사에 앉아있는 자신에게 도전할 자는 아무도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방원의 만류를 뿌리쳤다. 하지만 이성계가 믿었던 방원은 개경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지난해 9월 돌아간 어머니 한씨의 묘가 있는 개풍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성계와 한씨는 부부다. 강씨는 제2부인이다. 한씨와의 사이에 6남매를 두었는데 한씨가 별세하자 묘 앞에 초막을 치고 아들들이 번갈아 가며 시묘살이를 했다. 때마침 방원의 차례가 되어 방원이 여막살이를 하고 있었다.
시묘살이 하면서 틈틈이 독서에 몰입했다. 이때 빠져든 책이 정도전이 전해준 <맹자>다. "덕을 잃은 군주는 신하가 폐 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당시로는 불온한 책이다. 방원은 이 책을 탐독하고 책장이 헤지도록 정독했다.
책을 읽어 내리면서 '덕을 잃은 군주는 신하가 폐하여도 된다'는 맹자의 말씀을 뛰어넘어 "덕을 잃은 왕조는 백성이 폐하여도 된다"라는 신념으로 비약하고 있었다. 고려를 폐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데 마지막 걸림돌은 정몽주라 지목하고 작은 아버지 이화와 정몽주 제거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방원이 빠져든 <맹자>는 정도전이 낙향하여 시묘살이 할 때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전해준 책이다. 천하를 경영하고 싶은 웅지를 품고 있던 정도전의 의식세계에 혁명의 불꽃을 심어준 책이다. 그 책의 칼날이 이제는 정몽주를 향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하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가시는 발걸음을 붙잡고 싶은 심정이옵니다."
이성계가 집을 나서 말에 오르려는데 부인 강씨가 따라 나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아주 영영 떠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 같소이다. 허허, 그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소?"
"방올이에게서 점괘가 나왔는데 실족하여 땅에 이른다 하옵니다."
방올(方兀)이는 강씨가 총애하는 이성계 집 전속 무당이다.
"길 떠나는 사람에게 무슨 망측한 소리요. 쓸데없는 소릴랑 거두시오."
"길에 떨어졌는데 만인이 모여 받든다 하니 더욱이 모를 일입니다. 부디 몸조심 하옵소서."
이성계는 말에 올라 황주로 향했다. 말 잔등에 앉아 부인 강씨가 한 말을 곱씹어 봤다.
"낙마했는데 만인이 모여 받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풀리지 않은 숙제였다. 쓸데없는 생각이라 치부하며 떨쳐버리려 해도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황주에 나아가 세자를 영접한 이성계는 돌아오는 길 해주에서 여흥으로 사냥을 즐기다 말에서 떨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중상이었다.
마지막 승부수를 띄워라
이 소식은 곧바로 개경에 전해졌다. 이성계의 중상소식을 들은 문하시중 정몽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때는 바로 이때다. 하늘이 내려준 기회다."
왕명을 거역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한 반란군 수괴 이성계를 제거할 시기는 바로 이때다 싶었다. 반란군 괴수 이성계를 처단하여야 인륜이 바로 서고 왕실이 바로 선다고 생각했다.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간(臺諫) 김진양을 불렀다.
"먼저 이성계의 보좌역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그를 도모할 것이다."
정몽주의 사주를 받은 김진양은 상소문을 올렸다. 공양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도당(都堂-도평의사사)에 명했다.
"삼사좌사(三司左使) 조준,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도전, 밀직부사(密直副使) 남은, 판서(判書) 윤소종, 판사(判事) 남재, 청주목사(淸州牧使) 조박을 유배형에 처하라."
공양왕의 명이 떨어졌다. 이성계의 오른팔 왼팔을 잘라내는 전격적인 조치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정몽주의 심복 김귀련과 이반을 조준, 정도전, 남은의 귀양 간 곳으로 나누어 보내어 그들을 국문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정몽주의 대 반격작전이었다. 개경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국 속에서 배신과 음모가 뒤따르는 첩보전이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정몽주가 일을 이렇게 전격적으로 진행시킨 것은 방원 진영에서 흘러나온 정보 때문이었다. 방원은 아버지의 이복동생 이화(李和)와 정몽주 제거계획을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이 음모를 전해들은 아버지의 이복형 이원계의 사위 변중량이 정몽주에게 고해 바쳤다. 이 소식을 접한 정몽주가 당하기 전에 회심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마지막 승부수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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