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리조트 리프트에는 하행선이 없다!

[덕유산 등반기] 향적봉에서 슬로프를 타다... 걸어서

등록 2007.02.01 16:39수정 2007.02.0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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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오르기는 세 번째였다. 1월 초 눈 많이 내리던 날, 덕유산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홀연 들어 고등학교 후배에게 문자메시지 찍어 보냈더니, 후배는 직장 동료와 후배까지 달고 가겠노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 덕에 관계 설명하기가 복잡해져 버린 일행 네 명은 1월 20일 아침 8시 30분에 구천동행 버스에 올랐다.

인삼랜드 휴게소를 거쳐 구천동까지 가는 길은 어쩐 일로 한번 막힘이 없었다. 간판에 '전주'가 들어가지 않으면 명함도 못 내밀겠다는 생각이 든 구천동 식당가에서 해장국으로 점심 두둑이 먹고, 입장료 없이 덕유산국립공원 문을 통과하니, 상쾌한 기분이 햇살 쨍쨍한 하늘과 같았다.


문화재관람료를 걷어 갈 권한은 있지만 더러운 구석 없을 수 없는 속세의 돈을 아직은 짐짓 멀리하고 계신 백련사 스님들, 계속 그리 멀리해 주시면 보살 되는 길이 따로 없지 싶었다.

향적봉으로 오르는 길

@BRI@백련사를 지나 향적봉으로 오르는 길에는 생각보다 눈이 없었다. 눈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햇살 쨍쨍한 덕에 눈 녹은 물이 넘친 곳은 진창을 이룰 지경이었다. 가파른 오르막은 짧지 않았지만, 칠보일휴(七步一休) 보법으로 쉬엄쉬엄 가다 보니 결국 하늘 아래 향적봉이었다.

향적봉이 왜 향적봉이던가. 오가는 사람들이 까먹고 버린 귤 껍질 삭는 향(香)이 쌓여(積) 향적봉 아니겠는가. 혹 공감은 하더라도 함부로 믿지는 마시라.

아직 해가 떨어진 시간은 아니었지만, 삿갓재대피소까지 갈 상황은 아니었고 하산길에 칠연폭포를 보고자 마음먹었던 참이기도 했으므로, 향적봉대피소에 짐을 풀기 위해 내려갔다.


있겠지, 없을 리가 없어, 토요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있을 거야. 그리 생각을 했건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 대피소에 묵을 자리가 없단다. 올라오면서도 몰랐는데, 그 말 듣고서 다리가 풀려 버리고 말았다.

'향적봉대피소는 꼭 예약을 해야만 이용할 수 있는 대피소가 아니잖아요(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속으로 외친 소심한 항변은 대피소 주변에 가득한 예약자들 앞에서 물색없는 투정이 되고 말았다. 향적봉대피소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찍어 보아야 할 번호, 063-322-1614. 기억해 두시라.


예약이 다 찼다고는 하지만 버티는 자에게 자리 있으리란 못 믿을 믿음으로 일단 저녁이나 해먹고 보기로 했다. 김칫국물을 십분 활용한 김치 햄 찌개를 끓여 먹는 동안, 옆에서는 까만 돌판 위에서 삼겹살이 지글거리고 있었다. 고깃덩이를 지고 올라온 것만 해도 대단타 싶을 판에 한 무게 할 것이 틀림없는 돌판까지라…. 관계 설명하기 복잡한 일행 네 명은 그냥 내일 하산해서 삼겹살 사 먹자고 결의했다.

날이 어두워지는 가운데 상황을 살피니, 버틴 자에게 자리가 생길 모양이긴 했으나 난방이 안 되는 창고 자리란다. 창고에서 덜덜덜 한밤 지샐 것이냐, 하산을 할 것이냐. 삼겹살 사 먹기로 결의한 일행은 그믐께 별빛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하산을 감행하기로 재차 결의를 했다. 단, 올라왔던 백련사 길이 아닌 무주리조트 슬로프로.

슬로프를 뭉개고 밟으며 하산하다

a 무주리조트 리프트.

무주리조트 리프트. ⓒ 안현주

덕유산 국립공원 한쪽 면을 깨끗하게 밀어 만든 무주리조트 슬로프는 과연 길었다. 국립공원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며, '엉덩 썰매'로 뭉개 보기고 하고 터벅터벅 밟아 보기도 하면서 한참을 내려왔다. 중간에 설면 다듬는 차도 한번 만난 뒤 닿은 슬로프 중턱, 드디어 야간스키 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운행 중인 리프트도 있었다.

여차저차 자초지종 설명을 했건만, 짐짓 피곤한 기색을 연출도 해 보았건만, 리프트 담당자는 안전문제 때문에 리프트 하산을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국립공원의 존재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면서 슬로프를 뭉개고 밟으며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해 두시라. 무주리조트 리프트에는 하행선이 없다!

햄버거 한 개 값이 갈비 1인분과 맞먹는 요지경 무주리조트. 그래도 인파는 넘치고 넘쳤다. 그냥 거기서 넘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무주 읍내로 나가 묵을 곳을 찾았건만, 무주리조트에서 넘친 인파는 이미 무주 읍내 여관을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한적하기로 이름난 '무진장'의 대표주자 무주에 남는 여관방이 없다는 건 귤 껍질 향적봉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남은 길은 하나, 무주 탈출. 여관방 찾아 무주 읍내를 한바탕 휘저은 택시는 도 경계를 넘어 영동 읍내로 달렸다. 그 새벽에 단돈 2만 원으로 전북에서 충북으로 달려 주신 기사 아저씨께는 뭐라 감사 말씀을 드려야 할지 지금도 모르겠다.

1월 21일 늦은 아침, 서울 가는 차편을 봐 놓고 일행의 결의에 따라 영동역 앞 식당에서 서울보다 훨씬 푸짐한 삼겹살 조찬을 하면서 생각해 봤다. 명심하자, 063-322-1614. 주의하자, 하행선 없다. 무주 읍내에 여관 차리면 한철 장사 거뜬하다.

그리고 또 하나. 다음엔 무주리조트 슬로프 확실하게 뭉개고 타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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