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 장악하면 전쟁을 지배할 것이다!

[신간] 로버트 해리스 <이니그마>

등록 2007.02.02 15:59수정 2007.02.0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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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니그마>

<이니그마> ⓒ 랜덤하우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북대서양에서 약 120척의 미국 상선이 영국을 향해 오고 있었다. 120척의 배에 실린 물건들은 모두 합해서 약 100만톤 가량의 화물이다.

기름과 목재, 강철, 고기, 설탕, 밀 등을 가득 싣고 있고 영국 전체가 2주일가량 먹을 수 있는 분유도 포함하고 있다. 바다에 빠지기라도 하면 바닷물이 우유로 변할 판이다.


이 상선이 가는 항로에 악명 높은 독일의 유보트 46기가 진을 치고 있다. 유보트의 목표물은 바로 이 상선들. 하지만 연합국의 수뇌부들은 이 유보트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유보트가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다.

독일군의 암호를 깨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120척의 상선과 만여 명의 승무원들은 북대서양에 수장될지도 모른다.

로버트 해리스의 <이니그마>는 이런 절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주된 소재로 암호가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암호문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가장 단순하게는 단어를 변경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문장 자체를 뒤집거나 읽는 순서를 바꾸는 방법도 있다. 여러 줄의 문장을 읽을 때, 가운데서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읽어나가도록 문장을 구성하는 방법도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철자를 치환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기원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a가 d로, b가 e로, c는 f로 각각 읽히도록 고안한 편지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규칙을 알면 아주 쉬운 암호이지만, 만일 모른다면 상대방은 이 암호문을 보고도 까막눈 신세를 면할 수 없다.

2차대전 때 독일군이 사용한 암호문의 기본 원리도 이와 비슷하다. 독일군은 이 암호를 만들기 위해서 '이니그마'라는 이름의 타자기 비슷한 기계를 사용했다. 철자 하나를 입력하면, 이 철자는 3개의 회전자를 거쳐서 암호화 된다. 이런 방법으로 생성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거의 무한에 가깝다.


거기에 더해서 단어 중간마다 아무 의미 없는 더미코드(dummy code)까지 삽입한다면, 이 암호문을 깨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2차대전 때 독일군이 이니그마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1942년말 독일군은 이니그마 기계를 약 10만 대 가량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기에 약점도 있다. 연합군의 두되는 이 암호문의 한 가지 약점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이니그마를 통해 암호화되는 철자는 실제와 같은 철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자면 A를 표기할 때, 이 문자가 이니그마를 통과해 암호화 된 이후에는 A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버트 해리스의 <이니그마>는 이런 독일의 암호체계와 싸우는 연합군의 이야기다. 여기에는 토머스 제리코라는 젊은 수학자가 등장한다. 전쟁 전에는 촉망받는 수학자였지만, 전쟁은 그의 신분을 수학자에서 암호 해독가로 바꾸어 놓았다. 암호를 해독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수학이다.

@BRI@연합군측 선단에서 엄청난 자료를 받아서, 유보트로부터 채집한 기상 신호와 일일이 대조한다. 그리고 경우의 수와 반복되는 패턴을 파악해서 추론과 검증을 통해서 표본을 만들어 간다. 그렇게 검증된 표본은 암호 해독의 '로제타 스톤'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작업을 하기에 가장 적당한 사람이 수학자 아닐까?

<이니그마>의 무대는 영국 런던 근교의 '블레츨리 파크'다. 이곳에는 영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수학자, 과학자들이 모여 있다. 강의와 연구실을 팽개치고 독일군의 암호 해독을 위해서 소집된 사람들이다. 주인공인 토머스 제리코도 마찬가지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젊은 수학자이지만,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인물이다.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천재의 모습이다. 제리코는 이 블레츨리 파크에서 암호 해독에 몰두한다.

북대서양을 가로질러 오고 있는 120척의 상선이 유보트와 조우하기까지 남은 기간은 약 3일. 그 3일 안에 독일군의 암호 체계를 파악하지 못하면 상선과 승무원은 모두 바다에 가라앉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블레츨리라는 곳은 속 편하게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유 없이 동료가 사라져가고, 제리코는 뭔가 알 수 없는 음모가 있다고 짐작하게 된다.

작가인 로버트 해리스는 전작인 <당신들의 조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설정을 보인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한 개인이 어느 날 거대한 음모에 휘말린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이 음모는 국가 차원의 커다란 음모다. <이니그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비에트 수용소에서 풀려난 폴란드 장교 8천 명의 행방이 문제시되고, 독일로부터 탈취한 이니그마 기계를 놓고 영국과 미국은 신경전을 벌인다. 그 와중에서 나약한 개인이 사건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어찌 보면 스파이 소설의 현대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고전적인 스파이 소설에서는 자신의 임무를 자각하고 있는 요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런 요원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그런 인물이 아니다. 갈등하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한발씩 천천히 진실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물이다. 로버트 해리스는 히스토리 팩션(Faction)의 거장답게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인물을 적절히 뒤섞어서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독일군은 이니그마 기계에 맹목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패망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암호체계가 깨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내부의 스파이가 정보를 유출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는 영국군이 독일의 암호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는 많을 것이다. 그중에서 한 가지는 바로 정보다. 우리 측의 정보를 유출시키지 않으면서, 상대의 정보와 통신을 파악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 승패는 판가름 난 것 아닐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서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그건 바로 현대전에서 정보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꿰뚫어본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암호가 있다. 완벽한 듯 보이지만 약점이 있는 암호. 인간이 만들었기에 인간이 깨뜨릴 수 있는 암호. <이니그마>를 읽으면서 느끼는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로버트 해리스 지음 / 조영학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덧붙이는 글 로버트 해리스 지음 / 조영학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에니그마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알에이치코리아(RHK),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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