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친구들은 더 가난해졌다"

[내가 겪은 IMF 10년] IMF가 빼앗아 간 우리의 10년

등록 2007.02.04 16:26수정 2007.02.0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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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서울 모대학교를 95년도 하계 졸업했다. 그리고 은행에 취직했다. 당시만 해도 경기는 아직 괜찮았다. 88서울올림픽 무렵부터 이어온 경제호황도 정점에 달했고, 김영삼 정부는 경제개방을 진행하고 있었다.


몇 차례에 걸쳐서 벌인 금융자유화, 시장개방 조치가 IMF사태의 도화선이 될 줄은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경제신문이나 TV토론에서 금융자유화와 경제개방에 대해서 찬반토론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는 정말 아무도 몰랐다.

경영학과를 나왔고, 비교적 경기가 좋았던 탓에 95년의 전후에 졸업했던 89, 88학번들은 비교적 취업이 잘 되었다. 우리 과 같은 경우는 취업률 100%였다.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는 수치지만 그때만 해도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은행에 입사한 나는 행원 3년 차 되는 해에 IMF사태를 맞이했다. 1997년 12월 이후 신문과 TV에서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형사태들이 계속 보도되었고, 정말 큰 일이 벌어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실 피부로 실감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속했던 은행은 오히려 IMF 사태의 수혜자였다. 은행권의 대형 구조조정 와중에 내가 소속된 은행은 오히려 덩치가 훨씬 큰 은행을 인수하여 은행의 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난 은행을 그만두었다. 건강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일단은 쉬면서 그 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대학원 공부나 하자고 간단히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일이 그 뒤 10여 년을 이어지는 힘든 일들의 서막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 때가 1998년 7월이었다.


20세기말부터 시작된 나의 기막힌 이야기

은행을 그만두고 나는 예정대로 대학원에 입학을 했다. 위기는 기회라 생각하고 MBA과정을 이수하면 더 좋은 기회가 많이 생길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대학원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대학시절에 비하면 갑절이 오른 학비에 '알바'를 전전해야 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강은 더 악화되었다. 결국, 대학원은 졸업은 못하고 간신히 수료만 했다.


대학원 수료 후 새직장을 알아봤지만 예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젠 경력직으로 취업해야 하는 내게 마땅한 일자리는 고사하고, 들어갈 수 있는 일자리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천운인지 어느 중소금융기업에 예전 연봉의 70% 수준에 간신히 입사했다.

새로 입사한 회사는 주식회사이기는 했지만 비상장으로 오너가 전횡을 휘두르는 황당한 회사였다. 엄연히 고용계약서를 쓰고 들어간 직원도 오너 한 마디와 전가의 보도 같이 '재털이 집어던지기'에 모욕이라는 모욕은 다 당하고 사직서를 쓰곤 했다. 거기다가 출퇴근 시간, 출근 일, 급여는 완전히 오너 마음이었다.

어쨌든 질기게 버티던 나는, 다시 건강악화를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평생직장이라는 신화에 여전히 매몰된 나로서는 정말 큰 타격이었다. 경제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그 후 주로 비정규직 계통의 일을 많이 하면서 2007년 새해를 맞이하였다.

IMF 이후 10년, 더 가난해진 나와 친구들

짬짬이 친구들을 만나보면서 동시대를 살아간 우리 동기들, 친구들의 삶의 방식은 어떠했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직은 40이 안된 친구들이지만 생활 방식 등에서 확연한 특징들이 있었다. 나만이 힘들어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덧 한 세대를 특정하는 특징들이 되어 버렸다.

첫째, 고용방식의 변화이다. 나와 친구들의 고용상태나 고용추세를 보면 참 이직들을 많이 했다. 우리 아버지는 한 직장에서 30년을 다니셨는 데 반해 우리의 친구들을 보면 최소 2회 정도의 이직을 했다. '고용합리화'조치 차원에서 아직도 젊은 30대에 명퇴당한 친구도 있고, 잘 나가던 친구는 연봉 더 받으려고 몇 번을 옮겨서 30대에 이사급이 된 친구도 있다. 물론 나처럼 비정규직을 전전하거나 그나마 비정규직도 아닌 촉탁직, 도급직, 자유직 등 이름도 다양한 온갖 방식의 고용패턴을 가진 친구들도 있다.

둘째, 전반적인 만혼의 추세이다. 우리 삼촌뻘 세대를 보면 거의 20대 후반에 결혼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내 주위에는 아직도 결혼을 안 한 친구가 많다. 어림잡아 보면 주변 또래의 30%는 아직 미혼이다.

그 이유도 다양하다. 마음에 차는 배우자를 못 만나거나, 워낙 일에 치여서 그런 경우도 많다.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일하고, 말이 좋아서 주5일제이지 주말에도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연애할 시간도 없다고 한다. 거칠게 말해서 시대와 세대의 키워드가 만혼과 독신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셋째, 정치적 의식의 다원화다. 내 동기와 친구들 중에는 골수 박근혜 지지자부터, 민주노동당원과 시민운동단체 일을 하는 사람이 모두 존재할 정도로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한 친구는 일상 대화에서도 "박근혜님께서"라고 깍듯이 표현을 할 정도로 박근혜 의원을 존경하고, 어떤 직장 후배는 '노사모' 활동을 여전히 하고 있다. 또 영화사PD를 하는 한 친구는 공개적인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IMF 이후 10년이라는 공간에서 한국사회의 정치경제 지형도는 변화했고, 내 주위 사람들의 정치의식도 다양해졌다.

넷째, 전반적인 소득수준의 저하와 그에 따른 반작용인 투자형태의 다양화이다. IMF 이후 10년이 우리 동기들에게 남긴 상흔 중의 하나는 선택받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높은 업무강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소득수준이 저하됐다. 재산의 규모가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주식, 펀드, 선물옵션, 부동산 경매 등 재산을 증식하는 수단이 굉장히 다양해졌다. 이는 IMF 체제 동안 고도화된 금융산업의 도구들이 우리 주변까지 저변확대가 된 까닭이다. 온갖 재테크 수단을 동원하여 부유해지고 싶어하지만 내 주위에는 젊은 신용불량자와 파산자가 심심지 않게 보이는 것 또한 현실이다.

10년을 견뎌온 친구들에게 영광의 잔을

이상으로 나의 IMF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하고, 내 친구들과 89학번 동기들을 중심으로 IMF 이후 10년이 변화시킨 점을 간략하게 살펴봤다. 나와 그들의 10년은 참으로 변화무쌍했다. 그런데,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고 말했다. 변증법에서는 역사란 나선형구조를 그리면서 상승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역사의 고난기이자 후퇴기 같은 시기를 견디면서 나와 내 친구를 비롯한 민초들은 많은 것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빼앗긴 10년' 끝에도 봄은 오고, 오랜 고통에서도 사람들은 무언가를 배우고 대응을 한다. 그것이 인간 삶의 역동적인 본질이다. 그런 힘든 시기를 일터에서, 가정에서, 현장에서 고단하게 넘긴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영광의 잔을 든다.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IMF 10년>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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