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30회

등록 2007.02.07 08:26수정 2007.02.0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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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철등이 깜박거림을 반복하며 다가왔다가는 물러나는 와중에서 급박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설중행은 마음이 초조해왔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이상 빨리 이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자칫 서두르다간 조금 전 단혁의 공격에 당한 것처럼 치명적인 상황을 맞을는지 모른다.

그는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지금 상황을 판단하고자 했다. 어느 쪽에 빈틈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제 백철등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점이었다. 잠시간 잃어버렸던 시력도 간혹 얼굴에 다가드는 강렬한 빛줄기만 피하면 그런 대로 견딜 만큼 회복되었다.


@BRI@그 때였다. 바람을 가르며 두 줄기 은사절편이 쏘아들었다. 하나는 그의 오른쪽 발목을 노리고 있었고, 시차를 두고 다가 온 또 하나의 은사절편은 그의 목을 노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체의 공격에 몸을 허공에 띄우거나 하면 바로 하체를 감아올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

하지만 설중행은 결코 몸을 띄울 생각이 없었다. 상대의 전력을 알아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한쪽 발을 슬쩍 들어올린 후 아래쪽을 노리던 은사절편을 피함과 동시에 어깨를 흔들며 목을 노리고 날아오던 은사절편의 편두를 피하며 바로 은사를 잡아챘다.

은사절편은 쏘아오는 속도는 빠르지만 그 편두가 무거워 그 뒤의 움직임은 그리 빠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헙…!"


그러나 그것은 설중행의 실수였다. 은사절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무모한 짓을 한 셈이었다. 스스로 실수했다고 느낀 것은 은사를 잡아채 간 그 순간부터였다. 손바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니 실제로 손바닥이 찢어지고 있었다.

은사철편의 은사는 단지 가는 쇠막대 위에 은사를 감은 것이 아니었다. 가는 은사에 아교로 유리가루를 묻혀 감은 것으로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심하게 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맨 손바닥으로 잡았으니 쇠로 만들어지지 않는 한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리가루로 인하여 통증이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흐흐… 은사절편의 무서움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애송이로군."

득의에 찬 상대의 음성이 들렸다. 상대는 은사절편을 힘껏 잡아당기고 있었는데, 그 순간 다시 세 줄기 은사절편이 그의 몸을 휘감아왔다. 허나 위기는 곧 기회였다. 조금씩 손해를 본다면 반 시진을 못 가 지쳐 붙잡힐 터였다. 이제는 모험을 할 시간이었다.

설중행은 손아귀에 피가 배어 나오고 있음에도 오히려 은사를 더욱 힘껏 잡으며 상대의 힘을 이용해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은 예상하지 못할 빠른 속도로 대청을 가로질러 반대편 쪽으로 쏘아졌다. 그대로 창문을 뚫고 나가면 될 터였다.

허나 그것은 설중행의 달콤한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백철등은 느닷없이 더욱 강렬한 빛을 뿜으며 그를 향했다. 너무나 밝은 빛줄기가 정면에 쏟아지는 바람에 시야를 잃어버릴 상태였는데 그 빛줄기를 따라 사방에서 날아드는 가는 세침이 반짝이는 것을 본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백철등에는 또 하나의 숨겨진 묘용이 비침을 발사할 수 있는 장치였던 것이다.

'낭패다… 정말 철저히 준비했군.'

설중행은 더 이상 생각할 여지없이 여전히 손에 잡혀있는 은사절편을 흔들며 그 탄력으로 허공에서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세침을 피함과 동시에 좌측으로 퉁겨나갔다. 아무리 위험하고 급박한 상황에 처했더라도 그것을 적절하고 능숙하게 이용하는 모습이었고, 기회를 엿보는 침착함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잔꾀가 많은 쥐새끼로군."

섬뜩한 옥기룡의 음성이었다. 이미 옥기룡은 단혁과 마찬가지로 설중행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탈출로를 봉쇄하는데 온 신경을 다 쓴 것 같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중행은 기이한 기류가 우측 옆구리를 노리고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확실히 다른 자들의 공격과 달라서 설중행은 마주칠 생각을 버리고 급히 몸을 좌측으로 비틀며 실내의 중앙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피할 수 있는지 보겠다."

백철등의 불빛도 이제는 꺼짐이 없이 설중행을 따라붙었고, 옥기룡 역시 빛살처럼 설중행을 따라붙고 있었다. 피하거나 도망갈 틈을 주지 않았다. 연속적으로 손과 발이 설중행의 몸을 파고들었다.

슈우-- 타닥---!

설중행은 몸을 가눌 사이도 없이 아미(峨嵋)의 절학인 구전환영보(九轉幻影步)를 펼쳤다. 옥기룡과 정면으로 마주친다는 것은 무리였다. 옥기룡 하나뿐이라면 죽기 살기로 해보겠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더구나 옥기룡은 보주의 제자답게 대단한 고수였다. 단 일수만 보더라도 그의 무공수위가 자신을 뛰어넘는 다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몸놀림은 매우 부드럽고 유연했다. 게다가 매우 느릿해 보이는 사이에 갑자기 빠른 변화를 일으켜 공격해오기 때문에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구전환영보 정도로 될까?"

옥기룡의 말투에는 이미 먹이를 다 잡은 듯한 자신감이 실려 있었고 상대를 조롱하는 듯한 기색도 섞여 있었다. 진즉에 나서고 싶었지만 백부의 시신 위에서 저런 자와 다투며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아 참았을 뿐이었다. 그의 양팔은 나비가 날아들 듯 부드럽게 밀어왔는데, 갑자기 설중행의 앞에서 빠르게 손을 뒤집으며 목을 잡아채 오는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상대로 하여금 예측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공격이어서 매우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정지되어 있는 듯 매우 느릿하게 보이다가 한 순간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흡사 낚시꾼이 고기가 입질할 때 빠르게 낚아채는 그런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옥기룡의 무공이 혈간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혈간은 옥기룡이 태어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던 나이부터 자신의 무공을 가르쳤던 것이다.

'헉…!'

설중행은 내심 탄성에 가까운 짧은 숨을 토하며 상체를 활처럼 휘었다. 동시에 더욱 빠르게 전력을 다하여 구전환영보를 펼치며 피해나갔다. 헌데 그가 급히 진력을 끌어올리자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며 뒷머리에 화끈한 느낌이 또 다시 밀려들었다. 세 번째 느끼는 이상 통증이었다.

'빌어먹을… 왜 진기만 끌어올리면….'

문제였다.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진기를 구성 정도 끌어올린다 싶으면 여지없이 가슴이 답답해지고 뒷머리에 혈맥이 파열되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그에 따라 그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찌이이익---

목덜미 쪽 옷깃이 길게 찢겨져 나갔다. 하마터면 목 줄기를 잡히고 옥기룡의 발에 옆구리를 채일 뻔했다. 순식간에 오초가 흘렀는데 그럼에도 결정적으로 설중행을 잡지 못하자 옥기룡은 짜증이 난 듯했다. 구전환영보가 아미의 절학이라고는 하나 자신도 이미 훤히 꿰고 있는 무공이었고, 상대가 다음에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까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정적으로 그를 잡지 못한 것에 대해 짜증이 날 만했다. 더구나 단혁을 비롯한 철기문의 수하들이 뻔히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놈을 쉽게 제압하지 못한다면 어찌 운중보주의 후계가 되겠다고 큰소리 칠 수 있겠는가? 전력을 기울여 뒤를 밀어주는 철기문의 식솔은 물론 돌아가신 백부에 대한 어찌 낯을 들고 있을 수 있을까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정말 도망치고 피하는 데에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놈이로군. 좋아, 이번에도 피할 수 있는지 보자!"

옥기룡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그는 왼팔은 허리에 붙이고 오른팔은 살짝 구부려 앞을 향했는데 그의 두 발은 아주 가볍게 바닥에서 떠 있는 자세를 취했다. 그것은 혈간의 독문비기인 선인천간(仙人天竿) 중 홍예금룡(虹霓擒龍)의 기수식(起手式)이었다.

무지개로 용을 낚는다는 그것은 한 번 걸려들면 용이라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무서운 초식이었다. 순간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서도 그의 몸에서 무지개 빛이 아른거리는 듯 했다. 또한 그의 오른손에서 은은히 무지개가 뻗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백철등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뿜어내는 무형기류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설중행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상적인 몸이라면 어찌하든 피할 수 있으련만 진기를 최대한 끌어올릴 수 없는 몸이었다. 그의 이마에 가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은 보이지 않았다. 있다면 오직 상대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으려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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