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중(守侍中)각하 큰일 났습니다. 이성계가 지난밤에 벽란도에서 돌아왔습니다."
"뭣이? 돌아왔다고?"
정몽주의 목소리는 거의 신음에 가까웠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 낙마하여 교자에 실려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죽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의 부상이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그의 오른팔 조준과 왼팔 정도전을 잘라내고 있는데 이성계가 돌아왔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부상은 어느 정도 이더냐?"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듯 하였습니다."
"없는 듯하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죽겠더냐? 살겠더냐?"
정몽주는 버럭 화를 내었다. 변계량은 머리를 조아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
"채비를 갖추어라. 내가 직접 그의 집에 나아가 이성계를 살펴봐야겠느니라."
숭교리 이성계의 집을 방문하겠다는 것이다. 발상을 뒤집는 상상 밖의 일이었다. 이성계의 건강상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일의 완급을 조절하고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뜻이다. 정몽주는 의외로 배포가 큰 인물이다.
"아니 되옵니다. 방원이 수시중 각하를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습니다."
"뭣이라고? 방원이란 놈이 나를? 고얀 놈 같으니라고…. 문병 길에 애송이의 버르장머리도 고쳐줘야겠구나."
"가시면 돌이킬 수 없는 불상사가 일어날 듯 하옵니다. 가시지 마시옵소서."
"범을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잡을 수 있느니라.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채비를 놓지 못하고."
집을 나선 정몽주
@BRI@정몽주는 집을 나서 말에 올랐다. 그의 방문은 외견상 사냥 하다 낙마하여 부상당한 이성계의 병문안이었지만 내심은 부상 정도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부상 상태에 따라 보주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정도전을 언제 처형 할 것이며 유배지에서 귀양살이하는 조준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정몽주는 선지교를 건넜다. 가지런히 서 있는 시렁돌이 오늘따라 망주석처럼 보였다. 묘각사(妙覺寺)에서 가져왔다는 다라니당(陀羅尼幢)이 유난스럽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가 건너는 선지교(善地橋)를 후세 사람들이 선죽교(善竹橋)라 부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정몽주가 숭교리 이성계 집에 도착했다. 그가 왔다는 소식에 식솔들은 화들짝 놀랬다. 이성계의 사랑채에 모여 있던 측근들은 정몽주 집에 박아둔 첩자로부터 그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놀라지 않았으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왔을까?"
"염탐하러 왔겠지…."
"대승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왔을지도 몰라."
추측은 무성했지만 정확한 핵심은 짚어낼 수 없었다. 방원 역시 그랬다. 서로의 가슴에 칼끝을 겨누고 있는 살얼음판 같은 대치상황에서 정몽주가 아버지를 찾아온 연유를 알 길이 없었다.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
"경거망동하지 말어라."
성질 급한 이화가 즉시 행동에 옮기자고 나섰으나 방원이 다독이고 나섰다. 정몽주를 맞이한 이성계는 비록 환자이지만 예를 다하여 정몽주를 맞았다. 정몽주 역시 정중한 예를 갖추어 문병했다. 쾌유를 비는 문병이었지만 서로의 시선은 싸늘했다. 정몽주가 문병을 마치고 나오는 순간 하인이 정몽주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서방님께서 사랑채로 모시라는 분부이옵니다."
"너의 서방님이 누구이더냐?"
"밀직대언 이방원이옵니다."
"방원이가…?"
정몽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애송이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고 싶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아 그냥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방원이가 보자 하니 잘되었다 싶었다. 하인의 안내를 받은 정몽주가 사랑채에 들어섰다. 앉아있던 방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맞이하며 상석을 권했다.
노 재상과 젊은이의 한 판 대결
마주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으나 눈빛에서는 불꽃이 튀기고 있었다. 탱탱한 긴장감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 가슴에 품은 생각까지도 서로 꿰뚫어 보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정몽주는 방원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자신의 몸에 꽂이는 것을 감지했다. 침묵을 깨고 방원이 입을 열었다.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여차역하여 여피역하여)
城隍堂後壇 頹落亦何如(성황당후단 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이런들 긔 엇더리, 뎌런들 긔 엇더하리
성황당 뒤담이 해인들 긔 엇더하리
우리도 이러히여 살어이신들 긔 엇더하리 <해동악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라고 회유하는 솜씨가 제법 세련됐다. 당대의 석학이자 일인지하 만인지상 문하시중 앞에 내놓은 문장 역시 유치하지 않다.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여차역하여 여피역하여)'이라는 문구가 간결하면서도 절묘하다. 어차피 백년도 못 사는 인생.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려보자는 것이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가 던져지듯이 긴장감이 탱탱하던 방안에 파문이 일었다. 방원이 많이 컸다는 것을 느꼈다. 만감이 교차했다. 이제 갓 출사한 '그저 괞찮다'는 젊은이로 알고 있었는데 자신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을 회유하려 든다는 것이 가소롭기도 했지만 그 기백에 전률마져 느껴졌다.
대척점에 있는 정적이지만 '아들 하나는 똑똑한 놈 뒀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재상의 자리에 있는 자신이 애송이로만 보아왔던 젊은이와 정면 대결을 펼치는 것이 격에 어울리지 않고 초라해 보이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쩌다 나라와 내꼴이 이 지경이 되었나?"라고 탄식하며 나라가 한심스러웠다. 경멸의 눈빛으로 방원을 바라보던 정몽주가 엷은 조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지여) <포은집>
이 몸이 주거 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 되여 넉시라도 잇고 없고
님 향 일편단심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청구영언>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캬, 기막힌 절구다. 이 한 몸 죽고 죽어 골백번 죽어도 어림없고, 백골이 흙이 되어 넋이 있고 없고 고려를 향한 일편단심이 가실 줄이 없으니 나를 설득하려 하거나 회유하려 들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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