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천안가서 점심 잡숫고 와요"

등록 2007.02.10 08:02수정 2007.02.1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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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오전부터 아버지에게 강제 외출 명령이 떨어졌다. 영감님 점심 챙기는 것이 귀찮아진 엄마가 상습적으로 내리는 지시다. 하긴 엄마 연세가 올해 78세니 남들 같으면 지금쯤 자식 손에 편하게 얻어 잡수실 때다. 그런데 고부가 같이 살면 서로 못할 짓이라고 굳게 믿는 엄마가 일찌감치 아들 며느리를 분가시킨 것이다.


세 끼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살림 일체가 엄마 손을 거쳐야 하는데 이 노인네가 연세를 잡숫다 보니 슬슬 꾀가 나신 것이다. 아버지가 편찮으시고부터 아침은 두유에 생식을 타서 드시니 아침밥 준비는 걸러도 된다. 문제는 점심, 아버지만 안 계시면 점심도 문제없다.

아파트 노인정에서 날이면 날마다 메뉴 바꿔가며 점심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총무 할머니는 음식 솜씨까지 빼어난 전라도 출신이라 더더욱 금상첨화다. 할머니들이 좋아하는 메뉴만 골라 장만하는데 호박죽, 팥죽, 콩나물 밥, 무나물 밥. 계절별로 많이 나는 나물반찬까지 곁들여 아주 훌륭한 점심 밥상을 차려낸단다.

오늘 아침도 일찌감치 총무 할머니가 전화를 주셨다. 점심에 콩나물밥을 하려는데 꼭 나오셔서 잡수시라는 전갈이다. 모처럼 친정 나들이를 한 큰딸도 점심 약속이 있다고 하니 영감님 점심만 해결되면 만사 오케이였다.

"엄마, 왜 천안 가서 점심 잡수시라고 하세요?"
"아, 차비가 공짜잖아. 운동도 할 겸 천안 가서 휘휘 돌아다니시다가 추어탕이나 보신탕 한 그릇 잡숫고 오면 얼마나 좋아. 그래서 낮에는 천안 가는 전철에 늙은이들이 바글거린다더라."
"그런데 노인정엔 할아버지 방이 따로 없어요?"
"왜 없어? 있지. 그런데 남자 노인네들은 잘 모이질 않아. 모이면 누가 청소를 하나, 점심을 차리나. 노인정에 맘 붙일 일이 하나도 없지 뭐. 아버지처럼 돌아다니실만한 노인네는 밖으로 돌고, 몸이 성치 않은 노인네는 방안에서 살고. 다들 그래."

그제야 이해가 갔다. 1호선 전철, 특히 천안 가는 전철을 탈 때마다 웬 할아버지들이 그렇게 많이 타시던지 볼 때마다 궁금하던 터였다. 종로로 출근할 때 매일 보던 풍경. 파고다 공원 안팎에서 소일하시던 할아버지들의 무대가 세월이 변함에 따라 전철 안으로 옮겨진 셈이다.


하기야 전철처럼 편한 곳이 또 있을까? 하루종일 탄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할 사람 있나. 차비 공짜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지, 소일거리 없는 노인들 시간 보내기 딱 알맞은 장소였다. 더구나 1호선 중에도 천안행은 왕복 시간이 네다섯 시간은 너끈한 장거리여행이라 갈아타는 수고도 필요 없는 황금 노선 아닌가.

a 마나님 생신축하 상을 같이 받으신 아버지.

마나님 생신축하 상을 같이 받으신 아버지. ⓒ 조명자

마나님 성화에 양복에 공작 깃털까지 꽂힌 멋진 중절모 차림으로 아버지가 지팡이를 집어드셨다. 남이 보면 어디 근사한 데 초대라도 받은 줄 알겠지만 마나님 명령대로 점심을 위해 천안까지 가시기 위한 차림새다. 같이 갈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천안 구경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점심 한 끼 때우기 위해 그 먼 길을 나서다니. 걸음걸이조차 어눌한 아버지 뒷모습이 유난히 처량해 보였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초리가 마음에 걸리셨던지 엄마가 재빠르게 사족을 다셨다.

"느이 아부진 게으른 양반이라 억지로 내쫓지 않으면 꼼짝할 생각을 안 한다니깐. 그래서 내가 일부로 천안 가시라고 한다. 요 가까운 데서 홀짝 잡숫고 들어오면 그게 어디 운동이 되냐? 천안까지 가면 오며 가며 운동도 되고 바람도 쐬고 하루 반나절 나들이론 거기만 한 곳이 없지."

마나님과 큰딸 앞에서 어린 아이 같이 바이바이까지 하며 현관문을 나서는 아버지. 하긴 얼마나 다행인가. 처자식 손 안 빌리고 당신 스스로 맛 기행 다니실 수 있다는 것이. 아버지보다 더 몸이 불편하셔서, 몸이 성하더라도 맛난 것 마음대로 사 잡수실 돈이 부족해서 오늘도 빈집에 홀로 남은 할아버지들이 또 얼마나 많으시겠는가.

나이 들수록 공동체 생활에 익숙한 할머니들. 노인정에 출퇴근하며 같이 밥 해먹고, 같이 나들이하고. 오늘은 외식하고 내일은 어디 견학 가고 또 시시때때로 순진한 할머니들 꼬셔 온천이다, 선물이다 떠안기며 고가의 엉터리 물건 파는 사기꾼들 찾아다니는 것까지. 매일 심심할 새 없이 꽉 짜인 일정표가 있는 이가 할머니들이다.

반면에 오라는 곳도, 갈 곳도 없는 쓸쓸한 할아버지들, 이 양반들의 노후는 정말 외롭고도 지루한 나날일 것 같다.

노인정 시설과 최소한의 운영경비가 보조되는 지금의 복지수준만 해도 감지덕지지만 하나 더 배려한다면 할아버지를 위한 도우미 제도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노인정에서 점심 준비해 주고 간단한 청소를 도맡아 주는 도우미가 있다면 지금처럼 할아버지들이 길바닥에서 우왕좌왕 안 하셔도 될 것 같건만.

옛말에 홀어미는 은이 서 말이고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라더니 연세 드신 할아버지들의 외로움을 생각하면 딱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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