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를 살해한 조영규가 부리나케 달려가 방원에게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보고했다. 정몽주의 죽음을 확인한 방원이 조심스럽게 이성계에게 알렸다. 병상에 누워있던 이성계가 벌떡 일어나 노발대발 탄식했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세상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不孝)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태조실록>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이성계의 마음이 진심인지 알 수 없다. 승자의 겸양일 수도 있다. 대의에 입각하여 불충과 불효를 거론하지만 소의 즉, 정치적인 입장에서 정몽주의 죽음은 이성계에게 큰 손실로 여겨졌다. 고려를 멸하고 '새나라'를 개창했을 때 백성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정몽주를 전면에 내세우려던 이성계의 전략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후대의 아들과 손자가 역사에 초연 할 수 있었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를 기록한 태조실록은 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한 1413년 하륜 주도하에 편찬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세종 조 1488년 정인지가 증보 편수했다. 실록은 사관이 기록한 사초에 준거하여 편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개국 초기 실록관(觀)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왕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데 한계성을 가진 군주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몽주가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당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가당이나 하겠습니까? 몽주를 죽이는 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방원은 당당했다. 정몽주를 살해한 것이 효도이며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한 가문을 구한 거사라며 아버지를 설득하려 들었다. 방원이 아무리 설명해도 이성계의 노기는 풀리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방원이 옆자리에 앉아있는 강씨를 바라보며 하소연 했다.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시지 않습니까?"
잔뜩 급했을까? 이성계의 제2부인 강씨를 어머니라 불렀다. 강씨는 방원과 11살 차이나는 젊은 여인이다. 방원은 평소에 강씨를 어머니라 부르는데 인색했다. 아버지의 제2부인 강씨는 생모 한씨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몹쓸 여인이라 생각하며 미워했다.
"어머니" 소리를 듣는 것이 소원이었던 강씨에게 어머니라 부른 방원
강씨는 항상 전 처 한씨 소생들로부터 배척받고 무시당하는 것 같아 서러웠다. 그 중에서도 제일 애착이 가는 방원이로부터 "어머니"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 소리를 처음 들었으니 내심 흐뭇했다. 평소에 방원이를 바라보며 “나에게는 왜 저런 아들이 없나?”라고 부러워하던 강씨였다.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하였는데 이정도 일에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강씨의 일성이 터졌다. 고려에서 감히 이성계를 질책할 사람이 없는데 여걸다운 일갈이다. 9년 전, 두매 산골 함주에 정도전이 찾아와 ‘새나라’의 청사진을 펼쳐 보일 때 강씨는 낙관했다.
정조전의 두뇌와 이성계의 용맹이 조화를 이룬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혁명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성계가 주저하고 있으니 일침을 놓은 것이다.
사태의 추이를 가다듬은 이성계는 수하 장사길(張思吉)을 불러 장졸들로 하여금 집안을 에워싸고 방비를 튼튼히 하라 일렀다. 이튿날 이성계는 황희석(黃希碩)을 대전에 들여보내 공양왕에게 보고 하도록 했다.
"몽주가 대간(臺諫)을 몰래 꾀어서 충량(忠良)을 모함하다가 지금 이미 복죄(伏罪)하여 처형(處刑)되었으니 마땅히 조준, 남은 등을 불러 오게 하소서."-<태조실록>
정몽주를 노상에서 격살하고 ‘죄인이 복죄하여 처형했다’ 고 신하는 아뢰고 실록은 기록되어 있다. 왕이 모르는 수시중(守侍中)의 처형. 평상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혁명 상황이다.
“대간(臺諫)은 탄핵을 당한 사람들과 맞서서 변명하게 할 수는 없다. 경(卿) 등은 다시 말하지 말라.”
공양왕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예상하지 못한 공양왕의 반발에 부딪힌 이성계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자신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여 말을 할 수 없는 언어장애의 지경에 이르렀다. 예상치 못한 긴급 상항이 발생한 것이다. 이성계 진영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정보참모본부'를 이끌던 방원, 전면에 나서 진두지휘 하다
“상항은 유동적이다. 또 어떠한 변수가 작용하여 역풍이 불어올지 모른다. 8부 능선을 넘었다고 자만하거나 여기에서 주저앉는다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된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난관에 봉착했다고 물러설 방원이 아니었다.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방원이 직접 전면에 나섰다. 혁명을 진두지휘하고 나선 것이다. 태풍의 눈은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위치가 변해 있다. 한번 구르기 시작하여 탄력을 받은 혁명의 심장부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조준과 정도전을 모셔 오도록 하라."
이자분(李子芬)에게 밀명을 내렸다. 왕명이 아닌 방원의 명이다. 그리고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 이성계로 하여금 입궁하여 공양왕과 담판 짓도록 종용했다. 이제는 ‘정보참모’에 머물러 있던 예전의 방원이 아니었다. 왕명을 무시하는 특명을 내리고 아버지를 움직이는 지휘자의 입장에 선 것이다.
“만약 몽주의 무리를 문죄(問罪)하지 않는다면 신(臣)을 죄주기를 청합니다.”
병석에 누워있던 이성계가 편치 않은 몸을 이끌고 입궁하여 ‘차라리 날 감옥에 넣어 달라’고 들이대니 공양왕이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공양왕은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 문하평리(門下評理) 김주, 동순군제조(同巡軍提調) 김사형 등에게 명하여 대간을 국문하게 하니 좌상시(左常侍) 김진양이 토설하기 시작했다.
“정몽주, 이색, 우현보가 이숭인, 이종학, 조호를 보내어 신(臣)에게 이르기를 ‘판문하(判門下) 이성계(李成桂)가 공(功)을 믿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다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보좌역(補佐役)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이성계를 도모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태조실록>
김진양의 공술로 이숭인, 이종학, 조호는 즉각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었다. 김진양과 우상시(右常侍) 이확, 우간의(右諫議) 이내, 좌헌납(左獻納) 이감, 우헌납(右獻納) 권홍, 사헌집의(司憲執義) 정희, 장령(掌令) 김묘와 서견, 지평(持平) 이작과 이신(李申)을 귀양 보냈다. 정몽주의 추종세력과 공양왕을 감싸고도는 궁중 신하들의 소탕작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