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의 치열한 '성장통'

[서평] 쉰네 순 뢰에스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

등록 2007.02.21 21:11수정 2007.02.2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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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사진 ⓒ 문학동네

한국계 입양아 출신 작가, 브라게 문학상 수상 작가로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쉰네 순 뢰에스의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는 어떤 책일까? 최근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쉰네 순 뢰에스'(한국 이름 "지선")란 이름을 자주 접하곤 하는데, 정작 그녀의 국내 데뷔작인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에 대한 평가나 소개는 다소 부실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특이한 이력에 가려서 그녀의 작품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걸까?
냉정히 말하자면 그건 어디까지나 작가와 작품이 지닌 파괴력에 달려 있다. 만약 그녀와 그녀의 작품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태풍으로 한국에 상륙했다면 그 파장 역시 엄청날 것이고, 잔잔한 미풍 정도로 그친다면 그 파장도 작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쉰네 순 뢰에스'란 이름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태풍이 아닌 잔잔한 미풍에 더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모국 나들이는 나름대로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태풍처럼 강렬하고 충격적인 첫인상을 심어주었다고 볼 순 없을 것 같다.

사실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란 작품만 해도 그렇다. 이 작품엔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기승전결이나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같은 형식적인 구분도 무의미하다. 그 대신 '가을', '겨울', '봄'이란 계절적 변화가 주인공의 정신적 변화를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미아'라는 17세 소녀다. 그녀는 이 작품을 이끌어 가는 실질적인 주인공이자 1인칭 화자다. 무엇보다 그녀는 심한 조울증을 앓고 있다. 그로 인해 이 작품의 주무대는 다름 아닌 정신병원이다.

앞서 이 작품엔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17세 소녀의 일방적인 시각, 생각, 내레이션(해설)에 의존한 채 전개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조울증 환자의 자기 독백인 셈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소설과는 형식이나 기법상 다를 수밖에 없다.

또 조울증을 앓는 17세 소녀의 일방적인 해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보니 독자가 수집할 수 있는 정보 역시 극히 제한적이다. 주인공인 '미아'가 왜 조울증에 걸렸는지,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지 확실히 알기 어렵다. 심지어 주인공인 '미아'가 진짜로 조울증을 앓고 있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다. 그 이유는 주인공 '미아'가 자신의 병력(病歷)을 강하게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해설 자체가 예술과 조울증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가을' 장(章)에선 '미아'의 내레이션(해설)이 조울증 환자의 병증인지 아니면 그녀의 표현대로 천재적인 예술성의 발현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만큼 '미아'가 구사하는 언어가 생동감 있고 유려하기 때문이다. 단지 주인공이 자신의 병력을 강하게 부정한다고 해서 독자들이 그 말을 믿을 리는 없다. 그러나 주인공이 구사하는 언어가 독자의 고정관념을 허물고 가슴을 파고들면 독자는 예술과 조울증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그 점이 쉰네 순 뢰에스가 가진 비범한 재능이다.

@BRI@이 작품은 비록 탄탄한 구성이나 이야기 구조를 가진 작품은 아니지만 1인칭 화자 시점의 내레이션(해설)을 지탱하는 작가 특유의 미려한 문체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각종 언론 매체에서 쉰네 순 뢰에스를 소개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 역시 다름 아닌 '문체'다. 그만큼 그녀의 문체는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주인공의 내면적 변화에 따라 문장의 형태도 조금씩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인 '미아'가 자신의 병력을 강하게 부정하며 조금씩 혼돈의 늪 속으로 침잠해 가는 단계인 '가을'의 문장은 거의 정상적인 화법에 가깝지만 문단의 구분이 없다. 그래서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읽다 보면 뭔가 정리가 안 된 느낌을 받는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겨울'의 문장은 짧은 호흡의 파편화된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극도로 황폐해진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의도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은 다른 장에 비해 짧은 편이다.

마지막으로 '봄'에선 비교적 문단의 구분도 잘 이루어지고 있고, 주인공의 언어도 일상적인 화법에 좀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이제 '미아'는 자신의 병력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병을 치료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꿈꿔 왔던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글쓰기도 다시 시작한다. 그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가족, 친구들과도 화해하고, 당당하게 홀로서기에 나선다.

작가는 조울증을 앓는 17세 소녀 '미아'가 겪었던 성장통을(한 장의 사진 속에 피사체를 담아내듯)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정감 어린 독특한 문체로 포착해서 작품 속에 담아냈다. 어쩌면 '미아'는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누구나 성장통을 겪는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결국 작가가 말하려 했던 것은, "꽃 내음 가득한 봄이 오기까지 우리는 혹독한 가을과 겨울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아닐까? 그리고 비록 영양가는 없지만 우리에게 심미적, 정신적인 영양분을 공급하는 꽃을 통해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

쉰네 순 뢰에스 지음, 손화수 옮김,
문학동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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