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잘할래요"

[해외리포트] 댈러스 한글학교 아이들의 설날 풍경

등록 2007.02.19 11:20수정 2007.07.09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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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선생님, 떡국이 정말 맛있어요."
"선생님, 한복이 참 예뻐요."
"세뱃돈으로 받은 1달러 새 동전, 앨범에다 보관해 오래오래 간직할래요."
"선생님, 투호(投壺) 놀이 진짜 재밌어요. 다음 주에도 할 거죠?"

17일 미국 댈러스 인근 캐롤톤시에 있는 뉴송교회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넘쳐났다. 가끔 영어가 섞여 들리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일주일 중 그 어느 때보다 한국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이날은 '댈러스 한인학교'의 설날 행사가 열린 날. 이 학교는 교회 건물을 빌려서 매주 토요일, 이곳 한인 아이들을 상대로 한글교육을 하고 있다. 댈러스, 캐롤톤, 갈랜드 세 분교에 400여명의 학생들이 한두 살 아이들을 위한 유아반부터 중고등부까지로 구분돼 한글 교육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보통 한 학교의 학생수가 200명이 채 안 된다. 이 점을 감안하면 비록 토요일만 모인다고 해도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a 댈러스 한인학교 4-1반 학생들이 곱게 한복을 입고 세배를 하고 있다.

댈러스 한인학교 4-1반 학생들이 곱게 한복을 입고 세배를 하고 있다. ⓒ 신기해


"새해, 복, 마니, 바드세용"

21개 학급으로 세 분교 중 가장 규모가 큰 캐롤톤 캠퍼스는 이날 오전 9시 반부터 낮 12시 반까지 아이들을 위해 세배, 떡국 먹기, 오자미, 투호, 닭싸움, 윷놀이 등의 행사를 벌였다. 세배 행사는 뉴송교회의 노인 네 분을 모시고 반별로 돌아가면서 세배를 드리는 것으로 진행됐다.

학교 측은 미리 1달러짜리 새 동전과 봉투를 준비해 노인들이 세뱃돈을 직접 아이들에게 주도록 배려했다. 교회 체육관 옆방에서 오전 10시부터 진행된 세배 행사에 앞서 아이들은 각 반에서 세배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남자들은 먼저 무릎을 꿇고 손을 바닥에 대고 이마가 손등에 닿도록 허리를 굽히는 거야. 자, 선생님이랑 같이 해 보자."
"It’s too hard. Why I have to do so? (너무 어려워요. 왜 이렇게 해야 하죠?)"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종현(10)이는 한국말을 거의 할 줄 모른다. 선생님한테 손을 흔들며 "하이"라고 인사하는 데 익숙한 종현이에게는 머리를 숙여야 하는 한국 인사법이 많이 어색하다. 그런 종현이에게 큰절은 당연히 더 힘들 수밖에 없다.

"종현아, 그래도 큰절을 배워서 엄마한테 한 번 해 드리면 엄마가 아주 좋아하실 거야. 힘들더라도 배워보지 않겠니?"
"네, I'll do(할게요)"
한 번 더 고집을 부릴 법한데도 종현이는 한국인 엄마가 좋아한다는 말에 생각을 고친 것 같았다. 힘든 큰절을 선생님을 따라 열심히 배웠다.


"여자들은 먼저 다리를 이렇게 꼬고 엉덩이를 땅에 닿게 한 다음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이는 거란다."
여자애들은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하는 큰절 방법에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금방 재밌어졌는지 저희들끼리 큰절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했다.

"새해, 복, 마니, 바드세용."
선생님과 몇 번이나 연습을 했지만 받침이 들어가는 어려운 한국말을 아이들이 정확하게 발음하기는 어려웠다. 영어식 발음이 섞인 말로 세배를 한 아이들에게 노인 분들은 세뱃돈을 주었다. "감사합니다" 대신 "땡큐"라는 말이 먼저 튀어 나왔지만 세뱃돈을 받아든 아이들의 모습은 한국에 있는 여느 아이들과 다름이 없었다.


뒤돌아 나오기가 무섭게 봉투를 뜯어서 얼마 들어 있는지 확인했다. 고학년 아이들은 달랑 1달러밖에 없다는 걸 알고 낙심하는 모습이, 저학년 아이들은 1달러가 얼마만한 돈인지도 모르면서 마냥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선생님한테 자기가 받은 세뱃돈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는 저학년 아이들도 있었다.

떡국에 부른 배, 오자미와 닭싸움으로 꺼지다

a 오자미 놀이를 하는 유치부 아이들.

오자미 놀이를 하는 유치부 아이들. ⓒ 신기해

세배가 끝난 후 4~6세 유치부 아이들은 교회 식당에서 떡국을 먹었다. 부모들과 선생님들이 준비한 떡국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랐다. 집에서 자주 떡국을 먹는 아이도 있었지만, 처음 먹어보는 아이도 있었다.

"떡국 맛있어요. 에그(egg)랑 김이랑 들어 있어서 더 좋아요."
혼혈아인 카이(4)는 처음 먹어보는 떡국인데도 맛있게 한 그릇을 금방 비웠다. 한국말을 잘 못해 한글학교에 와서도 영어만 쓰려고 하는 효진(5)이도 떡국은 맛있다며 친구랑 재잘대며 금방 다 먹어버렸다.

고학년들은 떡국을 직접 먹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이 프로젝트를 통해 보여주는 떡국, 잡채, 부침개 등 설날 음식 사진들을 보았다. 예은(10)이는 "떡국 너무 좋아해요, 엄마가 자주 해 줘요, 설날에 떡국 먹는 게 좋아요"라고 말했다. 같은 나이이지만 한국말을 잘 못하는 원경이도 "어제 엄마가 떡국이랑 잡채도 같이 해 주셨어요, 잡채는 좀 핫(hot)했지만 맛있었어요"라고 말했다.

떡국을 먹은 유치부는 교회 내 작은 홀에서 오자미 놀이를 했다. 한국에서처럼 큰 공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선생님들은 상자의 밑동에 얇은 종이를 붙여 오자미를 던지면 쉽게 터질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들었다. 안에는 사탕, 초콜릿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넣어두었다. 선생님들은 일주일 내내 상자를 만들고 오자미를 빌려오는 등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들이 쉽게 터뜨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님들의 생각과 달리, 남자 아이들의 실력이 발휘됐다. 한두 번 남자 아이들이 던진 오자미를 맞은 박스는 금방 터지고 사탕과 초콜릿이 쏟아졌다.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사탕을 줍기에 여념이 없었다.

a 닭싸움을 하는 아이들.

닭싸움을 하는 아이들. ⓒ 신기해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은 같은 시간 넓은 홀에 모여 닭싸움을 했다. 선생님들은 다리를 어떻게 꼬는지부터 가르쳐야 했지만 한번 배운 뒤에는 열기가 고조됐다. 둥글게 둘러 앉은 아이들은 자기 팀 친구가 나오면 크게 함성을 질렀다.

한국어로 응원을 가르치려는 선생님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연신 "컴 온!" "고, 고, 고!"라며 자기 편을 응원하고, 상대편 친구가 나오면 "부~"라며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활기찬 놀이여서인지 한 아이도 자리를 뜨지 않고 닭싸움에 몰입했다.

결과는 여자팀의 승리. 작년 추석 때 팔씨름의 승리도 여학생에 돌아갔다며 이 분교 권혁환 교장은 "역시 한국 사람은 여자들이 더 잘 나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씨, 왜 이렇게 안 들어가는 거야"

초등학교 4학년 나이이지만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이 모인 4-1반에서는 투호 놀이가 벌어졌다. 선생님은 한국 식품점에서 사 온 큰 김치병에다 은박지를 붙여 투호통을 만들었다. 투호는 중국식당에서 구한 긴 나무젓가락. 끝 부분에 태극기랑 성조기를 나란히 붙여 장식했다.

선생님의 한복과 설날에 대한 긴 설명에 지겨워하던 아이들은 선생님이 신기한 놀이기구를 들고 오자 함성을 지르며 반겼다. 1, 2등에게만 준다는 선생님의 선물을 보고는 서로 투호를 던지겠다고 나섰다. 종이에 번호를 써서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했다.

a 투호 놀이.

투호 놀이. ⓒ 신기해

첫 순서로 나선 하나(10)는 듣기는 잘 하지만 한국어로 말하는 데 아직 서툴다. 하나에게 한국어의 존댓말은 너무 어렵다. 평소 선생님에게 "선생님, 알았어, 나 그거 할 거야"라거나 "선생님, 안녕"하기 일쑤다.

"에이씨, why is it so hard to insert these!(왜 이렇게 안 들어가는 거야)"
"하나야,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똑바로 던져야지."
1m도 안 되는 거리에 놓인 투호통에 연습할 때는 잘 들어갔는데 막상 게임에서는 잘 안 들어가자 하나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이날의 투호 경기에서 1등은 평소 얌전하기만 하던 재모(10)에게 돌아갔다. 다른 남자아이들과 달리 말쑤가 적던 재모가 침착하게 6개 투호 중 4개를 성공시킨 것. 나머지 2등을 놓고 하나와 진혁(10)이가 맞붙었다.

둘은 예선전에서 2개씩 성공시켜 재경기를 하게 됐다. 3차례에 걸친 재경기 끝에 승리는 결국 진혁이한테 돌아갔다. 여학생들의 응원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하나는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한 번 더 경기 하자고 선생님을 졸라댔다.

한글학교에 오는 한인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의 강요에 의해 온다. 영어만 잘 해도 학교에서 칭찬받을 수 있는데 별로 쓸모 없어 보이는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는 많이 없다.

최근 미국에 히스패닉 이민자들이 급증해 차라리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을지언정, 부모가 한국 사람이라고 한국어를 꼭 배워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는 드물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한글 교육을 중간에서 포기하고 만다. 흥미가 없는 수업에 능률이 오르기도 만무하다.

이날 설날 행사는 그런 아이들에게 동기 부여를 하는 데 성공한 듯했다. 평소 학교가 끝나는 12시 30분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들은 이날만큼은 집에 가는 걸 늦추고 싶어 했다.

"한국에서는 새해가 오늘부터 시작되는 거란다. 너희들은 새해 소망이 뭐니?"
"새해에는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고 싶어요."

이곳 아이들은 한국인의 몸에, 미국식 사고방식을 지닌 채 문화의 경계지대를 걸어가고 있다. 설날 행사를 마친 아이들의 새해 소망은 한국인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세종학당? 자생적 한글학교에도 관심을

지난달 11일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세계에 보급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김 장관은 "2011년까지 전 세계 100곳에 외국의 일반인을 상대로 한 한글학교인 '세종학당'을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김 장관은 그동안 해외 한국어 보급이 한국어를 전공하는 소수의 상류 지식층을 위주로 진행돼 왔지만, 세종학당은 프랑스의 '알리앙스 프랑세즈'나 독일의 '괴테 인스티튜트'처럼 현지 일반인 대상의 소규모 학교 형태로 운영돼 더 효과적으로 한국어를 확산시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의 세기'로 불리는 21세기, 한국의 문화 정책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김 장관의 계획은 환영받을 만하다. 하지만 '새롭게 설립되는' 한글학교라는 개념 속에서 이미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전통의 자생적' 한글학교는 경시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해외 거주 한인들의 수는 2001년 기준으로 142개국, 565만 명에 달하고 있다. 이들이 세운 해외 한글학교는 미주 1139개, 옛 소련 508개, 아시아 157개, 유럽 85개 등 모두 1923개(2003년 기준)에 이르고 있다.

이 학교들은 한국 정부가 영어 교육 강화에만 관심이 있을 때, 해외에서 한글을 지키려고 온갖 역경을 무릅써 왔다. 새로 예산을 쏟아부어 거창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에 이들 한글학교와 해외 한인 자녀들의 한글 교육에 더 관심을 쏟는 게 어떨까.

재외 한글학교 1곳당 지원되는 평균 금액은 2003년 기준으로 연 약 1200달러(141만원)에 불과하다. 한인들의 높은 교육열 탓에 한인 2세들은 해외 곳곳의 요직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이들은 부모의 언어를 잊어버린 채 민족성을 상실해왔다.

이들은 '동북아의 중심국가'를 꿈꾸는 한국의 주요 해외 기반이 될 수 있었음에도 한국의 뒷북 정책에 소실돼 가는 소중한 인적 자원이 되고 있다. 세종학당 발상이 한글 보급마저 관 주도로 해야 한다는 구시대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면 21세기 한국은 암울하다.
#댈러스 #한인학교 #설날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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