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37회

등록 2007.02.21 08:27수정 2007.02.21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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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는 모두 따돌렸다. 아마 생사림 근처에서 모든 흔적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나무 위에 올라 신음을 간간히 흘리는 설중행의 입을 틀어막고 일각이나 모든 움직임을 정지하고 있었다.

물을 머금은 나무에서 습기가 배어나와 축축하게 옷을 적시고, 새벽이슬은 아예 속옷까지 물기를 머금게 했다. 본래는 운무소축으로 스며들 생각이었다. 단지 숨어있을 곳을 찾았다면 운무소축이 제격이었겠지만 설중행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운무소축은 설중행의 상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터였다.


@BRI@또한 아무리 조용하게 스며든다 해도 조그만 소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운무소축의 주인은 자신들이 누군지 확인이 된다면 반갑게 맞아들였겠지만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에 불쑥 나타난 그들을 아무런 잡음 없이 맞아들이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소리 없이 제압하기에는 무화란 여인의 무공수위는 그리 호락호락 않았다. 결국 자신들의 뒤를 쫓고 있는 추적자의 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망설임 끝에 그가 발길을 돌린 곳은 지금 바로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움막이었다. 이곳은 이름도 성도 알려지지 않고 그저 귀산노인이라 불리는 사람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사실 능효봉으로서는 되도록 이곳에 오지 않으려 했다. 결국 한번은 반드시 들러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었다.

또한 그가 이곳에 나타난다면 귀산노인은 아주 커다란 오해를 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구구절절 지나온 모든 일들을 말해 주어야 하는 귀찮은 일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 위기라고 느끼는 순간 제일 먼저 뇌리에 떠오른 곳이 바로 여기였다.

한편으로는 어차피 한번은 겪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과거 어느 한 시기에 자신과 한 약속을 평생 잊지 않고 자신을 기다렸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약속에 대한 대답을 언젠가 주어야 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지금 그 대답을 주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청각을 최대한 높여 주위 십여 장 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나무 위에서 몸을 날려 소리 없이 내려섰다. 마음을 다졌지만 잠시 망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움막을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에 찾아온 자신의 결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이었다.


“……!”

어차피 있으나마나 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둠 속에서 기껏 열 걸음도 옮기지 못할 좁은 공간을 뒷짐 지고 오가며 서성대는 노인을 볼 수 있었다.


“역시 나이 들면 새벽잠이 없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오. 묘시(卯時)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일어나 계시니 말이오.”

“미친 자식!”

어둠 속에서 대뜸 욕설부터 나왔다. 눈매를 가늘게 뜬 귀산노인이었다.

“이미 내가 올 줄 알고 있었으면서 뭐 그리 험악하게 욕부터 해대시오?”

급박한 상황에서도 능효봉은 능글거리는 투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귀산노인은 이미 능효봉이 올 줄 알고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기껏 그 꼴을 하고 나를 찾아오려고 이십칠 년이란 세월을 허비한 것이냐? 그래 이제 자신이 생겼나?”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지만 능효봉에게는 매우 또렷하게 들렸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이미 추숙(楸叔)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귀산노인의 성이 추(楸)씨 이었던가? 헌데 추숙이라니?

“네가 큰소리치던 것을 이루었냐는 말이다? 그 때가 되어서 이제 나를 찾아 온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귀산노인의 음성에 점점 노기가 짙어졌다. 한편으로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는 듯 들렸다.

“아홉 살짜리의 꼬마가… 아무 것도 모르는 철없는 꼬마가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오?”

능효봉의 말투나 태도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리 심각할 일도 그리 중요한 일도 없다는 듯한, 그러면서도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그 태도였다. 귀산노인이 서성거리다 몸을 홱 돌리며 능효봉을 똑바로 노려봤다.

“아니… 내가 믿은 건 아홉 살짜리 어린애 말이 아니라 내 평생 유일하게 존경한 그 분의 핏줄이 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피란 내려오면서 아주 혼탁하게 변할 수도 있는 법이오.”

“자신의 무능함과 나태함에 대한 아주 훌륭한 변명이구나.”

귀산노인이 이렇게 심하게 자신을 비난하고 질책한다 해도 능효봉으로서는 사실 합당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노인이 탓하듯 자신의 무능함이나 나태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이유를 대라면 할 말은 없었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길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그가 경험하면서 가지게 된 세상에 대한 특이한 가치관 때문일 것이었다.

“추숙의 기대를 저버려서 죄송하다고 해야 하오? 아니면 지금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하오?”

귀산노인 역시 더 이상 능효봉을 비난하거나 질책할 마음이 없었다. 사실 자신 역시 비난이나 질책을 할 입장도 아니었고, 그 비난과 질책에 대해 능효봉과 똑같은 책임이 있었다. 능효봉의 말마따나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귀산노인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도우려고 했지만 도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와서 능효봉만을 비난하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운중보에 들어온 거냐? 네 꿈을 접었다면 사람들 눈에 띠지 않는 시골구석에나 처박혀 살 일이지.”

능효봉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장난기 어린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약속 때문이오. 추숙에게 한 약속은 어차피 내가 이십이 되기 전에 지키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했소.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만큼은 반드시 지키고 싶었소. 내가 받아야 할 최소한의 빚만큼은 받아야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 생각했소.”

능효봉의 얼굴에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러자 귀산노인은 갑자기 그의 모습이 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과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역시 능효봉에게는 자신이 평생 존경했던, 그리고 세월이 무수히 흐른 지금도 존경하고 있는 그 분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단지 혼자 모든 것을 헤치고 살아남으려다 보니 그러한 모습을 감추고 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귀산노인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말했다.

“그 빚을 받는 순간 너 또한 죽는다.”

“그럴 수도 있소. 하지만 나를 죽일 수 있는 인물은 이 중원에 존재하지 않소.”

남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어처구니없는 허풍이었다. 하지만 귀산노인은 왠지 그 말이 사실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귀산노인은 능효봉에게서 그 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능력을 발견했다. 지금과 같이 장난기를 거두고 말을 하자 남으로 하여금 그의 말을 믿어버리게 하는 바로 그 묘한 능력이었다.

“아홉 살 때 큰소리치던 모습과 똑같군.”

“어릴 때 굳어진 성격은 별로 변하지 않는 법이오. 다만 그 때는 내 능력을 모르고 큰소리쳤지만 이제는 내 능력을 알고 큰소리치는 것이 다를 뿐이오. 게다가 그 빚을 받고 나서 죽는다면 뭐 그리 억울하겠소?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은 거기까지 아니오?”

능효봉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사내가 가져야 할 야망을 접었다. 그의 부친이 그에게 강요하다시피 주입한 영웅지도(英雄之道)에서 이미 벗어난 지 오래였다. 다만 자식 된 입장에서 그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하기 위해 온 것뿐이다.

“결국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로군.”

귀산노인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어차피 자신이 수시로 알아본 능효봉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고, 결국 그러한 대답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터였다.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설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설 연휴를 기화로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설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설 연휴를 기화로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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