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노할아버지 산소야

외손주와 함께 부모님 산소에 성묘가신 아버지

등록 2007.02.21 14:32수정 2007.02.2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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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다녀와야겠어. 나 좀 데려다 줘. 나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 보고 싶다."


설전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가시겠다는 아버지를 "차가 막혀요", "너무 추워요", "길이 미끄러워요"라며 핑계를 대고 모시고 가지 않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산소에 다녀오시고 나면 한동안은 부모님 생각에 깊이 빠지셔서 슬프고 우울하게 지내시기 때문이지요.

@BRI@25년 전 칠십둘에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를 경기도 가평 선산에 모신 아버지는 울적하고 쓸쓸하실 때면 가족들도 모르게 산소를 찾곤 하셨습니다. 5년 전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후로는 더욱 자주 산소를 찾으셔서 혹시나 우울증이 아니신지 걱정도 많이 했었지요.

최근 들어 '치매'라는 질병을 얻게 되신 아버지는 가끔 25년 전 할아버지 말씀을 하십니다. 할아버지도 당시 심각한 치매를 앓고 계셔서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집을 잃어 버리셔서 온 가족이 며칠씩 할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일이 빈번했었거든요.

"내가 길을 잃어버리니 할아버지 생각이 나더라. 노인양반이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싶더라. 일주일만에 부랑자수용소에서 할아버지를 찾았잖니. 며칠 사이 눈이 퀭해진 노인네가 나를 보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우시는데…."


아버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십니다.

"나 가야겠다. 내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 보러 간다는데 왜들 못 가게 하는 거냐. 안 데려다 주면 혼자 갈 거야."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아버지.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섰습니다.

"주석아. 노할아버지 노할머니 보러 가자. 노할아버지 노할머니가 우리 주석이를 보면 이쁘다∼ 착하다∼ 하실 거야."

느닷없이 할아버지와 소풍을 가게 된 주석이는 그저 즐겁고 신이 납니다.

외손주와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를 찾으신 아버지.
외손주와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를 찾으신 아버지.김혜원
예전 같았으면 단숨에 올랐을 언덕바지를 지팡이를 짚고도 거친 쉼을 몰아쉬며 허위허위 오르시는 아버지. 산소 앞에 다다르자 다리에 힘이 풀리시는지 그만 풀썩하고 주저앉아 버리십니다.

"아버지 어머니 저 왔습니다. 그동안 자주 못 와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증손주도 데려왔습니다. 이쁘시죠? 좋으시죠?"

여섯 살 외손자를 벗삼아 술을 따르고 절을 하시는 아버지 눈에 살짝 물기가 맺히는 듯하더니 이내 아이처럼 편안한 미소가 감돕니다. 어머니, 아버지 품안에 안긴 아이처럼 천진한 그런 미소지요.

"햇살이 좋아서 그런데 산소가 따뜻해. 아버지 어머니 따뜻하시죠? 이제 겨울도 다 갔습니다. 꽃피고 잎이 오르면 또 오겠습니다."

잠시 행복한 어린 시절의 상념에 잠기셨던 아버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인사를 하십니다.

"이제 됐다. 가자 주석아. 노할아버지 노할머니께 인사드려. 이제 갑니다. 이제 가렵니다."

칠십다섯. 말라버린 산소의 떼처럼 머리에 하얀 서리를 이고 계신 아버지지만 여섯 살 주석이처럼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 품에서 어리광을 부려보고 싶으셨던가 봅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언덕을 내려오는 길, 이름 모를 새 한마리가 '푸드덕' 큰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릅니다.
첨부파일 조손의 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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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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