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빼앗길 수 없는 땅, 홀로섬 ①

등록 2007.02.21 14:13수정 2007.02.21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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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6년 2월 일본 시마네현이 발행한 <포토 시네마> 독도 특집호의 표지.

2006년 2월 일본 시마네현이 발행한 <포토 시네마> 독도 특집호의 표지. ⓒ 시마네현

지난 해 4월 14일 오후, 한 건의 뉴스가 한국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일본 해상보안청 해저탐사선이 한국측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탐사하려 한다는 뉴스였다. 일본의 동기는 한국측이 독도 부근 해저의 한국식 지명을 국제수로기구(IHO)에 등재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도 부근까지 진입하지는 않았지만 동해에 뜬 일본 탐사선은 한국 정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일 외무차관 회담에서 “IHO 등재신청을 적당한 시기로 미룬다”는 약속을 얻어낸 후에야 일본 탐사선은 뱃머리를 되돌렸다.

일본이 무력기구인 해상보안청 선박을 독도에 파견하려 한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일본이 지금 당장이라도 무언가 큰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국이 독도에 대해 그보다 훨씬 강도 높은 주권적 행위를 할 때에는 고작 항의 수준의 대응밖에 하지 않던 일본이 IHO 등재신청 같은 비(非)주권적 행위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국가권력의 배타적 행사인 주권적 행위와 비교할 때에 IHO 등재신청은 국가권력이 또 다른 권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주권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비주권적 행위에 대해 해상보안청 선박을 파견할 정도라면 주권적 행위에 대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한 행동을 취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본이 두려워하는 것은?

@BRI@1953년 이후 한국 정부가 이승만 라인을 침범한 일본 어선들에 대해 포격을 가하여 총 328척의 배와 44명의 사상자(일본측 주장)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상응하는 대응을 취하지 않았다. 또 한국이 헬리콥터 이착륙 시설(1981년)과 500톤급 선박 접안시설(1997년)을 설치하였지만 일본은 그때마다 외무성 항의 정도의 대응만 취했을 뿐이다.


일본의 행동은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19세기말이래 일본이 취한 대외 행위를 관찰해 보면 일관된 행동패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IHO 등재신청의 함의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IHO 등재신청은 비주권적 행위인 동시에 국제적 행위다. EEZ 문제는 별도로 하고 독도에만 국한시켜 보면, 독도 해저에 대한 한국식 지명 부여는 독도가 한국령 임을 인정하는 국제적 방증(傍證)을 도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제기구의 권위 있는 결정을 통해 그러한 방증에 명분이 실리게 된다는 점이다.


일본의 우려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이 독도에 대해 주권적 행위를 하는 것보다도, 국제사회에서 ‘독도는 한국 땅’이 인정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이 독도에 대해 주권적 행위를 할 때에 일본이 겉으로 항의를 하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그다지 우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해상보안청 선박 파견 같은 위협을 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의 수준의 ‘경미한 대응’밖에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이 한국의 행위에 대해 속으로는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있으며 지금 당장 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위해 뭔가를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일본이 지금 참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며 일본이 생각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일본이 지금 당장 참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존 동북아질서의 구조 때문이다. 미-일-한 동맹 하에서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거친 플레이를 한다면 이는 동맹을 파괴하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과도한 플레이는 미국의 휘슬에 의해 제지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역내 패권이 존속하는 한은 한국이 독도에 빌딩을 짓건 항공모함을 배치하건 간에 일본이 2006년 4월 수준의 강력한 대응을 취할 가능성은 낮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도에 대한 일본의 전략은 현재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겨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다가올 미래’라는 것은 미국의 패권이 소멸하고, 일본이 홀로 서기를 하게 되었을 때를 가리킨다. 현실적으로 볼 때 일본이 독도를 취할 수 있는 적기는 ‘포스트 미국’ 시대뿐이다.

독도 영유권 획득을 위한 일본의 미래 카드는

일본은 ‘다가올 미래’에 어떤 카드를 내놓을까? 일본의 카드 중 한 가지는 2006년 4월에 드러났다. 그때 일본은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점에 대한 국제적 명분이 조성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였다.

평소에는 항의 수준에 머물던 일본이 이때만큼은 강수를 던졌다는 사실은 일본이 애착을 갖는 바가 바로 그곳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의 등재신청을 그대로 방치하면 자국의 미래구상이 깨질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일단 강수를 던져본 것이다.

이 점을 볼 때에 일본이 ‘다가올 미래’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국제적 명분이 조성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계속해서 견제행위를 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이 없는 새로운 동북아 질서 하에서 (1)‘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국제적 명분을 구축하고 (2)그것을 바탕으로 독도 영유권을 획득하는 것이 일본의 기본 구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럼, 미래 동북아 질서 하에서 (2)와 관련하여 일본이 취할 구체적 시나리오는 무엇일까? (2)와 관련하여 일본의 행동패턴을 드러내는 사례가 1946년이래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신, 그 단서를 1946년 이전의 상황 속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1860년부터 1946년까지의 동북아 질서도 현존 동북아질서와 본질적으로 유사했으므로, 1946년 이전의 사례 속에서 (2)와 관련된 행동 패턴을 도출하는 것은 유효한 접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이 유효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유사한 국제환경 하에서 국가가 취할 수 있는 행위의 유형은 일정한 범위로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돌발 변수나 특출한 전략가가 출현하지 않는 한 이 명제는 유효할 것이다.

흔히 아편전쟁(1840년)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질서가 와해되었다고들 말하지만, 아편전쟁 이후 실제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달라진 것이 별로 없기에 서양 열강이 중국을 상대로 제2차 아편전쟁(1958년)을 감행했던 것이다.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출현은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때부터 청나라는 서구식 국제관계(상주 외교관 수용 등)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현존 동북아질서의 원형이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함에 따라 한반도가 전략적 요충지로 부각되고, 러·영·청·일 등이 한반도를 중간에 놓고 상대방을 견제하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또 1860년 이후로 동아시아에서는 권력구도의 변화도 생겼다. 이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권력의 양대 축은 러-영이었다. 1854년에는 사할린섬 동북쪽의 캄차카반도에서 양국 군대가 충돌하기도 하였다.

세련되고 계획된 일본의 침략 방식

그런데 베이징 조약 이후로 양국은 역내에서 대결을 자제하기 시작하였다. 태평천국운동(1851∼1864년)에서 중국 민중의 역량이 드러났는데 다가 러시아가 조선·일본에 근접함에 따라, 더 이상의 충돌은 쌍방을 공멸로 이끌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이처럼 양대 강국의 대결이 소강상태로 들어선 틈을 타서 독·프·미 그리고 일본이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현대식 표현으로 하면, ‘포스트 미국’ 시대에 기존의 2선 국가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셈이다. 일본이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860년 이후의 ‘동아시아 권력공백’을 잘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일본이 어떻게 세력을 확장했는가를 살펴보면, 일본이 독도와 관련하여 국제적 명분을 중시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시기에 일본은 중국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오키나와-대만-조선을 하나씩 점령하였다. ‘병풍’을 제거한 다음에 그 안에 있는 중국을 침략하는 것이 일본의 전략이었다.

일본이 세 지역을 점령한 방식은 ‘무식한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도로 세련되고 잘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은 국제적 명분을 먼저 확보한 다음에 군사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방식을 취했다. 군사력 행사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국제적 견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국제적 명분을 차근차근 구축해 두었던 것이다.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873년 4월 일본 외무대신 소에시마 다네오미는 “청나라의 통치권은 대만에 미치지 않는다”는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부)의 발언을 확보했으며, 그 다음 해인 1874년에 일본은 대만을 침공하였다. 그리고 청일전쟁(1894년) 이후 중국의 동의를 받아 대만을 할양 받았다.

소에시마 외무대신은 또 총리각국사무아문으로부터 “조선의 전쟁에 청나라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확보한 뒤에 그 2년 후인 1875년에 운요호사건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조선과의 합의를 명분으로 1910년에 조선을 강점하였다.

1894년에도 일본은 러·영·미·독·프·이탈리아의 중립을 확보한 다음에 청나라를 공격하였다(청일전쟁). 이후에도 일본은 국제적 명분과 상대방의 동의를 내세워 중국을 점차 침략해 갔다.

포스트 미국 시대를 기다리는 일본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남의 땅을 빼앗기 전에 국제적 명분 내지는 승인을 미리 구축해 두는 세련된 모습을 보였다. 일본의 세련된 외교활동은 군사침략을 위한 준비행위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례들을 볼 때, 변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훗날 독도에 대해서도 일본이 유사한 전략을 취하리라고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독도와 관련하여 국제적 명분의 축적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미리 축적해 둔 국제적 명분을 바탕으로 포스트 미국 시대에 자신들의 군사적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일본의 전략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금 일본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점들을 볼 때에 일본은 지금 당장에는 한국과 충돌하려 할 가능성이 낮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지금 당장에는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국제적 인식이 형성되지 않도록 견제하는 데에 주력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향후 전략과 관련하여 2가지는 확실히 단언할 수 있고 1가지는 과거 사례에 비추어 예측을 할 수 있다.

확실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미국 패권 종결 이후의 권력공백기를 활용할 것이라는 점과 국제적 명분의 확보를 근거로 독도에 대한 행동에 나설 것이라는 점이다.

과거 사례에 비추어 예측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일본이 동북아의 권력공백기에 국제적 명분을 확보한 다음에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워 독도를 무력 점령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제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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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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