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2일'을 왜 일본이 기념하나?

빼앗길 수 없는 땅, 홀로섬 ②

등록 2007.02.22 10:05수정 2007.02.23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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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일본은 '8월 15일'을 기념한다. 종전기념일이든 패전기념일이든 간에 일본이 8·15를 기념하는 것은 전승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를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8·15를 기념하는 과정에서 어떻든 자신들의 문제점을 생각하거나 반성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청일전쟁 도발일(日), 러일전쟁 도발일, 태평양전쟁 도발일, 대만 강점일, 을사늑약 체결일, 대한제국 강점일 등은 기념하지 않는다. 만약 일본이 그런 날을 기념한다면, 국제사회는 일본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은 처음부터 기념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BRI@그런데 비록 지방자치단체 차원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유독 독도를 빼앗은 날만큼은 드러내놓고 기념하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이 지정한 2월 22일 '다케시마의 날'은 곱씹어 보면 볼수록 고약하고 불쾌한 날이다.

2월 22일은 8월 29일(경술국치)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날이다. 8월 29일에는 국토 전체를 빼앗기고, 2월 22일에는 국토 일부를 빼앗겼을 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체 강탈이냐 부분 강탈이냐의 차이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을 합병했다"와 "다케시마를 편입했다"는 주장은 대한제국 및 독도 강점을 합리화하는 동일한 수사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대한제국 전체를 빼앗은 8월 29일은 기념하지 않으면서, 대한제국 일부를 빼앗은 2월 22일은 기념하고 있다. 일본이 시마네현을 앞세워 기념하고 있는 '다케시마의 날'은 이처럼 대한제국 일부에 대한 그들의 강탈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일본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대한제국이 아직 독립국이었을 때에 일본이 국제법에 의거하여 다케시마를 편입한 것이므로, 다케시마 편입과 대한제국 합병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19세기 말로부터 20세기 초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살펴보면, 이 같은 일본의 주장이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도 강점은 대한제국 강점과 동일한 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시마네현의 독도편입결정은 1905년 2월 22일에 있었고, 을사늑약 체결은 같은 해 11월 17일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만 보면,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아무런 강압 행사 없이 독도를 편입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1898년 4월 25일 이후로 대한제국이 사실상 일본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독도 강점은 대한제국 강점과 동일한 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대한제국이 1898년 4월 이후 일본의 영향력하에 들어가게 된 과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청일전쟁(1894년)의 국제정치적 의의는, 이 전쟁으로 인해 '청나라'라는 강력한 행위자가 조선 무대에서 탈락하였다는 점이다. 청일전쟁 이후 아관파천(1896. 2. 11) 때까지는 조선이 일본의 영향력하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아관파천 이후 웨베르-고무라 각서(제1차 러일협정, 1896. 5. 14) 및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제2차 러일협정, 1896. 5. 26)까지는 조선이 러시아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1896년 5월 이후부터 로젠-니시 협정(1898. 4. 25)까지 조선에서는 러·일 간의 세력균형이 유지되었다. 어느 한 나라도 조선에 대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기에, 고종이 이러한 정세를 활용하여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칭제(稱帝)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균형은 러시아의 자충수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1897년 11월 14일 독일이 산둥반도 남부의 교주만을 기습적으로 점령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러시아가 여순·대련을 점령함에 따라 동아시아에서는 반(反)러시아 국제연대가 급격히 형성되었다. 청일전쟁 때 서로 싸운 바 있는 청나라와 일본마저 러시아를 상대로 연합전선을 펼 정도였다.

'원초적 도발자'인 독일이 아닌 자국이 고립되는 예상 외의 형국이 조성되자, 러시아가 선택한 것은 일본과의 전격 타협이었다. 러시아는 만주를 확보하고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기로 한 것이다. 소위 만한교환(滿韓交換)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것이 바로 로젠-니시 협정이었다.

이렇게 하여 1898년 4월 25일 이후에는 조선이 일본의 단독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45년 8월 15일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렇게 한반도를 장악하였기에, 일본이 이를 발판으로 1904년에 만주 지배를 위해 러일전쟁을 도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조선이 사실상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 시점은 을사늑약보다 훨씬 이전인 1898년 4월 25일이었다. 36년도 인정하기 싫은데 47년(1898∼1945)까지 인정하려고 하면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조선은 1898년 이후로 일본의 단독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므로 1898년부터 1910년까지의 한일관계는 동일한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처럼 조선이 이미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 상황 속에서 조선의 독도가 일본의 지방행정단위로 편입되었다. 독도 강점은 일본의 조선 강점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대한제국 강점과 독도 강점을 별개로 분리하려는 일본 측의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8월 29일'은 기념하지 않고 '2월 22일'만 기념한다면 이는 대단한 모순

독도 강점이 조선 강점의 동일선상에서 벌어진 일인데, 일본이 1910년 8월 29일은 기념하지 않고 1905년 2월 22일만 기념한다면 이는 대단한 모순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국 침략에 성공한 날을 기념하려면, 기왕이면 더 큰 날을 기념해야 할 터인데 굳이 작은 날을 골라서 기념하는 그 심사가 고약하기만 하다.

2월 22일을 굳이 기념하고자 한다면, 그에 더해 8월 29일도 함께 기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솔직하고 또 논리적으로도 맞는 일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2월 22일은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기억'되어야 한다. 물론 '기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이 날이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2월 22일이 한국 국토 중 일부를 일본에 빼앗긴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 그날을 '기억'도 아닌 '기념'까지 하는 것은 너무 파렴치하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일본제국주의의 죄악상이 이미 오래전에 만천하에 드러났는데, 그 일본제국주의의 외국 침탈을 기념하는 것은 너무 뻔뻔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것은 동시에 한국인들을 무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일본에 털끝만큼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2월 22일을 '자숙의 날'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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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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